김성임 마르타

Korean 103 Saints 103위 성인
홈 > Knowledges > Korean 103 Saints
Korean 103 Saints

김성임 마르타

관리자 0 3567 0

 

신분 : 과부순교일 : 1839-07-20관련성지 : 서소문 밖

3232235521_yJK9xWin_c86f9e2301f76e0cd5099e68731c62fffefb8b73.jpg

 

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은 혼인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였다.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0 Comments
김대건 안드레아
관리자 0 0 0 8038 2017.01.16
신분 : 신부순교일 : 1846-09-16관련성지 : 새남터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Categ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