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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페르 브르트니애르 유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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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66-03-07관련성지: 새남터1866년 병인 박해 때에 순교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인 백 신부는 프랑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가 되었다. 수품 직후 동료인 김 헨리코, 민 루가, 서 루도비코 신부와 함께 고국을 떠나 이듬해인 1865년 5월 조선에 입국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백 신부는 정의배(丁義培) 회장의 집에 머물며 한국말을 배워,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정 회장이 체포된 다음 날인 1866년 2월 26일 장 주교의 하인이었던 이선이(李先伊)의 고발로 체포되어 갖은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3월 7일 새남터에서 28세의 나이로 장 주교와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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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덕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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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동정녀순교일: 1840-01-31관련성지: 당고개동정 순교자인 이인덕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6월 어머니 조 바르바라, 언니 이영덕(李榮德)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31일 당고개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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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흡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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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39-12-29관련성지: 서소문 밖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최창흡은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뒤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서른 살쯤 교우인 손소벽(孫小碧)과 혼인한 뒤로는 다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고 이 때부터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하였고,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崔榮伊)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사위 조신철(趙信喆)이 맡겨 둔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혹형을 받았으나 잘 참아 냈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고문을 이겨 내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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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스탕 야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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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39-09-21관련성지: 새남터한국 이름은 정 아각백(鄭牙各伯), 두 번째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인 선교사이다. 1827년 1월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가 된 정(샤스탕) 신부는 1836년 12월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곧 한국말을 배우는 한편 나 신부와 함께 각 지방에 퍼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거행하였다. 당시의 서양인 성직자들은 상제 옷으로 변장하고 험한 산길을 헤매야 했고, 소금에 절인 야채 따위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으며, 밤새도록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드린 다음 날 새벽에는 또 다른 마을로 길을 재촉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러한 고난을 감수해 가며 오직 복음 전파에만 힘썼던 것이다.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는 이 땅을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물들였고 정 신부도 범 주교, 나 신부와 함께 그 해 9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그의 나이는 35세, 이 땅에 들어온 지 2년 9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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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임 마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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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과부순교일 : 1839-07-20관련성지 : 서소문 밖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은 혼인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였다.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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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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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회장, 신학생순교일 : 1839-09-22관련성지 : 서소문 밖정하상은 정약종(丁若鐘)의 둘째 아들로, 외국 선교사의 영입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 교리를 당당하게 변호하였던 주님의 참된 용사이다. 그는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신학생으로 뽑혀 라틴어와 신학 공부까지 하였으나 성품을 받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7세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가 순교하자 숙부인 정약용의 집에 기거하다가 1813년 홀로 상경하여 교리를 배우고 교회 일을 도우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조신철(趙信喆), 유진길(劉進吉) 등과 함께 9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여 나 베드로(모방) 신부 등 네 분의 외국 신부들을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1839년 7월 모친 유소사 체칠리아(柳召史), 동생 정정혜 엘리사벳(丁情惠)과 함께 체포된 정하상은 곧 그가 쓴 「상재상서」를 대신에게 올렸는데 이 글은 한국 최초의 호교문이며, 그 뒤 홍콩에서 책으로 발간되어 중국에서도 널리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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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서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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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농부순교일: 1866-12-13관련성지: 숲정이경기도 수원(水原)에서 태어난 조화서는 1839년 기해 박해 때에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한 뒤 한 막달레나와 혼인하여 아들 윤호를 두었으며, 한때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복사 일을 맡았다. 1864년에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였고, 아내가 죽은 뒤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는데, 부자가 옥에서 순교를 다짐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아들과 함께 예닐곱 차례의 신문을 받은 조화서는 후손이 끊기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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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뇌 시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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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제4대조선교구장주교순교일: 1866-03-07관련성지: 새남터‘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며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에 사제가 되었고 동양의 선교 지역인 베트남으로 건너갔다가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그 뒤 만주 요동 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였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깊은 신심과 신학을 겸비한 장 주교는 이 땅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당뇨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쓰면서 여러 지역의 교우들을 열심히 돌보았다. 1866년 2월 23일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유스토, 서 루도비코, 김 헨리코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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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이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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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동정녀순교일: 1840-01-31관련성지: 당고개동정 순교자인 이경이는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혼기에 이르러 어떤 내시에게 속아 혼인하였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으며,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는 그 혼인을 무효화시켰다. 그 뒤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어머니를 시골에 사는 외삼촌에게 부탁하고 상경하여 한영이(韓榮伊), 권진이(權珍伊) 모녀의 집에서 살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7월 17일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는데, 밀고자 김순성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에 갇히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仕官廳)에 갇히게 되었다. 사관청에서 한 포졸이 권진이를 납치하려 하자 이경이는 권진이와 함께 탈출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었고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2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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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사 체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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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과부순교일: 1839-11-23관련성지: 옥사유 체칠리아는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상처한 정약종과 20세에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혼인 3년 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丁哲祥)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丁若鏞)의 집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조카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체포되었다. 유 체칠리아는 79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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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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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39-09-21관련성지: 새남터한국 이름은 나 백다록(羅伯多祿),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조선에 입국하여 순교한 신부로 1836년 1월 입국하여 서울 정하상의 집에 머물며 제2대 교구장인 범 주교를 도와 경기 충청 등 지방까지 선교하였다. 그는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마음을 두고 1836년 2월에 최양업을, 3월에는 최방제를, 7월에는 김대건을 서울로 불러 직접 라틴어를 가르치고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덕행을 쌓게 하다가, 때마침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이들을 비밀리에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성직자가 3명이나 입국한 사실이 당국에 알려지게 되자 범 주교에 이어 자수하였다. 1839년 9월, 홍주에서 정(샤스탕)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을 받은 끝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는 35세, 한국에 입국한 지 3년 9개월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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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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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과부순교일 : 1839-07-20관련성지 : 서소문 밖과부가 된 뒤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 생활로 친정 식구들을 입교시킨 김 로사는 1839년 1월 16일 권득인(權得仁)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신문을 받을 때 “하느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큰 주인이시라 배반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1839년 7월 20일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때 나이는 5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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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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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신부순교일 : 1846-09-16관련성지 : 새남터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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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호 바르톨로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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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원님순교일: 1866-12-13관련성지: 숲정이‘계식’으로도 불렸던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林川)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 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지만, 미처 소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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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률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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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66-02-17관련성지: 평양유정률은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짚신을 엮어 팔며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64년경 교리를 배우고 서울로 올라와 장 시므온(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극기하고 인내하는 생활을 하였고,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본 아내도 감동하여 입교하게 되었다. 1866년 초 박해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유정률은 친척들에게 세배하면서 자신의 순교를 예감한 듯 “안녕히 계십시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인사하였는데, 과연 그 날 저녁 이웃 마을인 고둔리의 공소에서 교우들과 함께 성서를 읽다가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유정률은 이미 체포된 100여 명의 교우와 함께 문초를 받았고, 다른 교우들은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배교하였지만 그는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분노한 감사는 배교한 교우 100여 명을 시켜 그를 세 대씩 때리게 하였다. 결국 체포된 다음 날인 2월 17일, 유정률은 300여 대의 매를 맞고 3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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