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운 요한

Korean 103 Saints 103위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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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103 Saints

전장운 요한

관리자 0 3378 0
신분 : 상인순교일 : 1866-03-09관련성지 : 서소문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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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으로도 불렸던 전장운은 서울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하여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지만,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 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다.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으로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여 최형,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으나, 얼마 뒤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고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는 바람에 전장운도 3월 1일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 3월 6일에 형조로 이송되었고, 3월 9일에 사형을 선고받아 그 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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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
관리자 0 0 0 8035 2017.01.16
신분 : 신부순교일 : 1846-09-16관련성지 : 새남터김대건은 1821년 충청도 솔뫼에서 천주교 신자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굳센 성격과 진실한 신심을 보고 1836년 나 베드로(모방) 신부는 그를 신학생으로 뽑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는 6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1845년 8월 페레올 주교에게서 사제품을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고국에 돌아온 김 신부는 서울과 용인 지방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 음력 4월 주교의 명에 따라, 선교사들의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김 신부는 편지를 중국 배에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서울 좌포도청으로 이송되었다. 취조 중, 김 신부의 넓은 식견과 당당한 태도에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도 아깝다고 생각하였으나 후환을 입을 것이라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대로 결국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의 처형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 신부는 망나니들에게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칼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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