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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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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부인순교일: 1839-09-03관련성지: 서소문 밖이광헌의 부인이며 이 아가타의 어머니인 권희는 1817년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박해 때문에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을 맡은 남편을 도와 주교와 신부들을 맞아들였고 또 교우들을 권면하여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수차의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다. 특히 열두 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끝내 모정을 억제하고 온갖 유혹과 형벌을 견디어 냈다. 이렇게 처참한 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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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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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66-03-09관련성지: 서소문 밖일명 ‘치장’으로도 불리는 최형은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태어나 14세 때 부모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는데, 그의 가족은 모두 열심한 신자였다. 1836년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던 신학생들 가운데 병사한 최방제(崔方濟)가 그의 동생이다.큰누이는 평생 동정이었으며 형 최수(崔燧)는 병인박해 때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다. 이렇게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자란 최형은 1836년 나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목수 일과 묵주 제작,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였고, 장 주교가 입국한 뒤 교회 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큰 공로를 남겼다. 1866년 장 주교가 체포되면서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자 전장운과 함께 체포되어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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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기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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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과부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김아기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전혀 신앙을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천주교를 알게 되어 교리를 배웠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열의는 대단하였다.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교리를 배우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金業伊), 한아기(韓阿只)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김아기는 “나는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릅니다." 하며 항구하게 신앙을 고백하였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다음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 갇혀 있던 교우들은 예수, 마리아 밖에 모르는 김아기가 왔다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그 후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아기는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끝에 옥중에서 대세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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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 헨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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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66-03-07관련성지: 새남터프랑스 뤼송 교구 출신인 김 신부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듬해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용인 손골에 부임하였다. 순교하는 날까지 운명을 함께한 서 신부와 가깝게 지냈으며, 한국말은 서툴렀지만 천성이 온순하고 친절하여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그는 손골에서 지내는 동안 교우들이 자신을 ‘김 신부’라고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기뻐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에 김씨 성을 가진 순교자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과연 김 신부는 자신의 소원대로 입국한 지 10개월 만인 1866년 2월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동료 사제들과 함께 27세의 나이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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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형 라우렌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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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46-09-20관련성지: 포청옥충청도 덕산(德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이형은 14세 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21세 때 혼인한 뒤 경기도 양지(陽智)의 은이 마을로 이사하였고,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과 뛰어난 덕행,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인정받아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 7월 말에 포졸들이 은이 마을을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듣고 가족들을 피신시킨 뒤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포졸들에게 심하게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어서 포졸들이 그를 말에 태워 가려 하였으나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에 오르신 예수님을 본받고자 백 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포청에서도 심한 형벌을 이겨 내고, 9월 20일 마지막으로 곤장 70대를 맞은 뒤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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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사 체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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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과부순교일: 1839-11-23관련성지: 옥사유 체칠리아는 명도회장 정약종(丁若鍾)의 부인이며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의 어머니이다. 상처한 정약종과 20세에 혼인하여, 남편의 권면으로 혼인 3년 만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남편과 전실 아들 정철상(丁哲祥)이 순교한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마재에 살던 시동생 정약용(丁若鏞)의 집에서 지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조카의 피신 권유를 거절하고 7월 11일, 아들 정하상, 딸 정정혜(丁情惠)와 함께 체포되었다. 유 체칠리아는 79세의 고령임에도 포청에서 곤장 230대를 맞는 혹형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냈다. 노인을 사형시키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어 있어서 여러 달 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3일 고문과 형벌의 여독으로 옥사, 순교하였다. 103위 성인 가운데 최고령 순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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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임 마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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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과부순교일 : 1839-07-20관련성지 : 서소문 밖인천 부평(富平)에서 태어난 김성임은 혼인에 실패한 뒤 서울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점쟁이와 재혼하였다. 이 때부터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천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밝은 얼굴로 생활하던 김성임은 1839년 4월 11일 자신이 몸붙이고 있던 이매임의 집에서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와 영희 자매, 김 루치아 등과 순교를 결심한 뒤 이미 체포된 남명혁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내고 7월 20일 7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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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혁 다미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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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회장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서울에서 태어난 남명혁은 젊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매우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 모든 세속의 나쁜 일과 손을 끊고 오직 신앙 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더욱 열심히 살아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신자를 모아 가르치고 병약자들을 방문하였으며 또 ‘성의회`(聖衣會)라는 신심 단체에 가입하여 신부를 도와 교회 일을 열심히 하였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초 한 예비신자의 밀고로 4월 7일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 때 그의 집에서 제의류(祭衣類), 경본(經本), 주교관(主敎冠) 등이 발견되어 포청과 형조의 관원들에게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그러나 남명혁은 모든 고통을 참아 냈고, 함께 체포된 아내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고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하여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영원히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편지를 써 보낸 뒤 5월 24일 이광헌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평소 ‘성의회의 치명자 남 다미아노’로 불리기를 바랐던 남명혁은 한창나이인 38세에 자신의 뜻대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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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주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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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동정녀순교일: 1839-09-03관련성지: 서소문 밖언니 김효임(金孝任)과 같이 동정 순교자인 김효주는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 뒤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龍頭里)로 이사해 살았다. 아버지를 여읜 뒤 온 가족이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언니 김효임, 동생 김 클라라와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는 아름다운 덕행과 극기로써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5월 3일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잔인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형조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1839년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2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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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업이 막달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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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과부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김업이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며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로 혼기에 이르러 교우 청년과 결혼하였다. 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해박한 교리 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살아가던 김업이는 1836년 10월 김아기(金阿只), 한아기(韓阿只)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 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6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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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득인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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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상인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서울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난 권득인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되던 해에 어머니마저 여읜 뒤 혼인하였다.얼마 동안은 약장사를 하는 형과 함께 살다가 분가하여 성패(聖牌)와 성물(聖物)을 만들어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항상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촛불을 켜 놓고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는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였다.권득인은 1839년 1월 16일 아내, 처남, 어린 자녀 등 4명의 가족 그리고 김로사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그의 신앙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뒤에 가족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자 권득인은 오히려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그 뒤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3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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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우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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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복사순교일: 1840-02-01관련성지: 당고개‘경천’으로도 불렸던 이문우는 경기도 이천(利川)의 양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5세 부모를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하였다. 독신으로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양모의 뜻에 순종하여 혼인하였고, 몇 년 뒤 아내와 두 자녀가 세상을 떠나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고 범 주교를 도와 지방을 순회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자 사방에서 희사를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을 돕고 박해 상황을 주교와 신부들에게 보고하던 중 11월 11일에 체포되었다. (성인은 교우들을 데리고 새남터 형장으로 가서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시신을 모셔다 노고산에 안장하였고, 그 후 성인도 체포되었다.) 이 때에 “주님께서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며 오히려 당황하는 포졸들을 재촉하여 포청으로 갔다. 포청과 형조에서 모진 고문을 참아 낸 끝에 1840년 2월 1일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31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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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기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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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부인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 강원도 강촌 출신의 박아기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였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였다.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아기는 남편, 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남편과 큰아들은 심한 고문으로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아기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모진 고문을 이겨 냈다.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형조로 이송되어서도,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는 형관의 갖은 유혹과 고문에도 박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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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집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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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환부순교일 : 1839-05-26관련성지 : 포청옥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예비신자로 열심히 생활하였다.그러나 점차 교리에 회의를 품어 신앙 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하였다.교우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뒤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 생활에 무슨 방해가 되느냐?" 하고 만류하자 장성집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았다.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성집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하였다가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인 4월 6일 체포되었다.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하였으나 장성집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과 고문을 참아 냈다. 그 뒤 장성집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대를 맞고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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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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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부인순교일: 1839-09-03관련성지: 서소문 밖이연희는 남명혁(南明赫)의 부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회장인 남편을 도와 공소(公所)를 세워 주교와 신부를 맞아들이고 또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준비하며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 열두 살 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의 형문을 받았으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3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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