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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영 알렉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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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역관순교일: 1866-03-11관련성지: 새남터‘세필’로도 불렸던 우세영은 황해도 서흥(瑞興) 향교 마을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우연히 알게 된 김 요한이라는 회장의 권면으로 관직에의 뜻을 버리고 서울로 내려가, 정의배에게 교리를 배우고 장(베르뇌)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 뒤 부모의 반대를 인내와 열정으로 참아 내어 가족들을 입교시키고 신앙 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했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2월 16일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평양 감영에서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곧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서울로 내려가 스승 정의배를 만나러 갔다가, 이미 체포된 정의배의 집을 지키고 있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같은 해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프티니콜라 신부, 스승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22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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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블뤼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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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제5대조선교구장주교순교일: 1866-03-30관련성지: 갈매못한국명은 ‘안돈이’(安敦伊)이며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던 안 안토니오 주교는 한한불(韓漢佛)사전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남겼고, 10여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완성하는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 풍속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데다 위장병과 신경통에 시달렸지만, 한국말을 잘하고 보신탕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인 사제로 알려져 있다. 1845년 10월 조선에 들어와 20여 년 동안 양 떼를 위하여 봉사하던 안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민 신부, 황석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더 심한 형벌을 받았다. 3월 30일에 안 주교 일행을 충청도 갈매못으로 압송한 형리들은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하였지만, 마침 이 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가 당일 집행을 요구하여 그대로 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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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서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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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농부순교일: 1866-12-13관련성지: 숲정이경기도 수원(水原)에서 태어난 조화서는 1839년 기해 박해 때에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한 뒤 한 막달레나와 혼인하여 아들 윤호를 두었으며, 한때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복사 일을 맡았다. 1864년에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였고, 아내가 죽은 뒤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1866년 병인 박해가 일어나자 12월 5일 아들 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 전면옥에 갇혔는데, 부자가 옥에서 순교를 다짐하며 서로 격려하였다. 아들과 함께 예닐곱 차례의 신문을 받은 조화서는 후손이 끊기는 것을 염려하는 척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아 5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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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앵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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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66-03-30관련성지: 갈매못민 신부는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으로, 1861년 사제가 되었고 1865년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충청도 내포에 머물며 안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운 뒤 홍주(洪州)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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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철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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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소년순교일: 1839-10-31관련성지: 옥사유진길(劉進吉)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난 유대철은 어려서 입교한 뒤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는 어머니와 누나가 그를 괴롭혔으나 그 때마다 어머니와 누나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유대철은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하는 것을 보고 순교를 결심하여 자수하였다. 그는 포도청에서 13세의 어린 나이로는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받았는데, 허벅지의 살을 뜯어 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 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에게 “믿고 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화가 난 형리가 시뻘겋게 단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니,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하였다. 열네 차례의 신문을 받고 100여 대의 매와 40여 대의 *치도곤을 맞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유대철은 언제나 평화롭고 기쁜 표정을 지었다. 형리들은 유대철을 배교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10월 31일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그는 103위 성인 중 가장 어린 순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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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협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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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군인순교일: 1840-01-30관련성지: 옥사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난 허협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해 8월에 체포되어 포청에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처음엔 잘 참다가 형벌을 이겨 내지 못하고 배교의 뜻을 밝혔으나 곧바로 배교를 취소하였다. 형리가 배교 취소의 표시로 인분 한 사발을 마시라고 하자 아무 거리낌 없이 인분 한 사발을 다 마심으로써 자신의 배교 취소를 증명해 보였다. 그 뒤 허협은 여러 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대 이상을 맞으며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내고 1840년 1월 30일 포청에서 옥사하여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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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사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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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과부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이소사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하였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살면서 어머니, 동생 이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는데, 1835년 2월(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 베드로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힘든 형벌과 고문을 참아 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 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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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헌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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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회장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이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廣州)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였으나 30세경 입교한 뒤로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도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하였다. 그리고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하게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신자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 주어 이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刑問)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된 그는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냈다.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뒤 5월 24일 남명혁(南明赫)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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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원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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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40-01-31관련성지: 당고개서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박종원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매우 궁핍하게 살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범(앵베르) 라우렌시오 주교가 입국한 뒤 회장직을 맡아 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해 있던 그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여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는 피신한 지 8개월 만인 10월 26일에 체포되었고, 이튿날 그의 아내 고순이(高順伊)도 체포되어 같은 옥에 갇히게 되었다. 박종원은 포청에서 아내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하였고 또 아내와 함께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48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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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순이 바르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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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부인순교일: 1839-12-29관련성지: 서소문 밖고순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고광성(高光晟)의 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朴宗源)과 혼인하여 3남매를 두고, 모범 가정이라고 칭찬을 들으며 살았다. 또한 회장인 남편을 도와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간호하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10월 26일 남편이 먼저 체포되고, 그 이튿날 고순이도 체포됨으로써 포청에서 남편과 만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형조에서도 남편과 함께 고문을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남편과 함께 모든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고순이는 12월 29일 남편 박종원보다 한 달 먼저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4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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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이 아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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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부인순교일: 1840-01-31관련성지: 당고개서울에서 태어난 권진이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 한영이와 함께 입교하였다. 13세경 혼인하였으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丁夏祥)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가 입국한 뒤부터 신부의 시중을 들었는데, 유 신부가 조선을 떠나게 되자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해 7월 17일, 같이 살던 한영이,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옥살이 중 한 차례 도망쳤던 죄로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40년 1월 31일 5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2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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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순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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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동정궁녀순교일 : 1839-05-24관련성지 : 서소문 밖동정녀이며 순교자인 박희순은 뛰어난 미모와 재주 때문에 어려서 궁녀로 뽑혀 궁궐에 들어갔으나, 어린 순조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으나 궁녀의 신분으로는 신앙 생활이 어려워 병을 핑계로 궁궐을 나왔다. 그 뒤로 조카의 집에 살면서 언니 박 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박희순은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전경협(全敬俠)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함께 체포된 많은 사람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박희순은 언니, 전경협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또한 다리가 부러지고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교우들에게 권면의 편지를 써 보내 교우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열정적인 신앙으로 모든 고통을 이겨 낸 박희순은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3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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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치백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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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사공순교일: 1846-09-20관련성지: 옥사‘군집’(君執)으로도 불리던 임치백은 한강변의 한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30년에 천주교를 알았으나 입교하지는 않았고, 천주교와 천주교인을 호의적으로 대하기만 하였다. 1846년 5월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갇혀 있는 옹진으로 가서 천주교인이라 속이고 자수하였다. 며칠 뒤 서울로 이송되어 포청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우고 곧 세례를 받아 순교를 결심하였다. 마침내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고, 6명의 교우와 함께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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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희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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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7
신분: 부인순교일: 1839-09-03관련성지: 서소문 밖이연희는 남명혁(南明赫)의 부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다. 회장인 남편을 도와 공소(公所)를 세워 주교와 신부를 맞아들이고 또 교우들을 가르쳐 성사를 준비하며 언제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였다. 기해박해 초인 1839년 4월 7일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 열두 살 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하며 모정을 억누르고 자신도 혹형과 고문을 감수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3차의 형문을 받았으나 역시 굴하지 않았다. 9월 3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3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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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집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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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신분 : 환부순교일 : 1839-05-26관련성지 : 포청옥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던 장성집은 30세경에 교리를 배우고 예비신자로 열심히 생활하였다.그러나 점차 교리에 회의를 품어 신앙 생활을 중지하고 세속 향락과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하였다.교우들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회개한 뒤로는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세속의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방에 틀어박혀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고 기도와 성서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이러한 태도에 집안 어른들이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 생활에 무슨 방해가 되느냐?" 하고 만류하자 장성집은 “제가 전에 지은 죄는 모두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편이 더 낫습니다." 하며 자신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밝혔고, 마침내 1838년 4월 세례와 견진 성사를 받았다. 굳은 결심으로 신앙에 귀의한 장성집은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할 목적으로 자수를 결심하였다가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았지만 며칠 뒤인 4월 6일 체포되었다.중병이 들어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하였으나 장성집은 포청까지 걸어서 갔다. 포청에서도 신문하는 형관에게 맑은 정신으로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혹형과 고문을 참아 냈다. 그 뒤 장성집은 5월 26일 마지막으로 치도곤 25대를 맞고 옥사함으로써 순교하였다. 그 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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