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103 Saints 3 페이지 > CaminoKorea 까미노코리아
까미노코리아 - 자전거 순례길
자전거순례
|
산티아고
|
성지순례
|
Santiago
|
gpx
|
까미노코리아
0
CaminoKorea
About Camino Korea
Pilgrimage Origin
Camino Korea Emblem
Pilgrimage Stamps
After Pilgrimages
Korea Pilgrimage
Walking Pilgrimage
서울
인천
춘천
원주
수원
청주
대전
전주
광주
안동
대구
마산
부산
제주
의정부
기타
Bicycle Pilgrimage
서울
인천
춘천
원주
수원
청주
대전
전주
광주
안동
대구
마산
부산
제주
의정부
해외
Santiago Pilgrimage
준비
후기
비용
교통
항공
숙소
명소
기타
Global Pilgrimage
Pilgrimage Photo
서울
인천
춘천
원주
수원
청주
대전
전주
광주
안동
대구
마산
부산
제주
의정부
해외
Pilgrimage Video
Knowledges
Guide for Scheduling
Korea Martyrs Shrine
서울
인천
춘천
원주
수원
청주
대전
전주
광주
안동
대구
마산
부산
제주
의정부
Overseas Korean Martyrs
SoutheastAsia
China
EU
Japan
America
Others
Korean 103 Saints
Korean 124 Blessed
Catholic History
Pilgrimage News
성지
순례
음악
성화
박물관
역사
기타
Cooperators
Advanced Guiders
Cycle Leader
Walk Leader
History Commentator
Trainer
Others
Go Together(bicycle)
국내당일
국내숙박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기타
Go Together(walk)
Popular Restaurants
Korean Food
Western Food
Chinese Food
Fusion Food
Cafe
Convenience Store
Accommodations
Deluxe Hotels
Motels
Retreat Center
Temple Stay
Guest House
Others
Help Desk
Notice
Schedule
Site map
Korea Martyrs Map
서울
인천
춘천
원주
수원
청주
대전
전주
광주
안동
대구
마산
부산
제주
의정부
해외
CaminoKorea
About Camino Korea
Pilgrimage Origin
Camino Korea Emblem
Pilgrimage Stamps
After Pilgrimages
Korea Pilgrimage
Walking Pilgrimage
Bicycle Pilgrimage
Santiago Pilgrimage
Global Pilgrimage
Pilgrimage Photo
Pilgrimage Video
Knowledges
Guide for Scheduling
Korea Martyrs Shrine
Overseas Korean Martyrs
Korean 103 Saints
Korean 124 Blessed
Catholic History
Pilgrimage News
Cooperators
Advanced Guiders
Go Together(bicycle)
Go Together(walk)
Popular Restaurants
Accommodations
Help Desk
Notice
Schedule
Site map
Korea Martyrs Map
SHOP
Home
CaminoKorea
After Pilgrimages
Knowledges
Cooperators
Help Desk
0
Guide for Scheduling
Korea Martyrs Shrine
Overseas Korean Martyrs
Korean 103 Saints
Korean 124 Blessed
Catholic History
Pilgrimage News
Korean 103 Saints 103위 성인
Korean 103 Saints 103위 성인
홈 > Knowledges > Korean 103 Saints
Korean 103 Saints
검색조건
제목
내용
제목+내용
회원아이디
회원아이디(코)
글쓴이
글쓴이(코)
검색어
또는
그리고
검색
Hot
베르뇌 시므온
관리자
0
0
0
3158
2017.01.17
신분: 제4대조선교구장주교순교일: 1866-03-07관련성지: 새남터‘베르뇌’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장 시므온 주교는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이며 한국명은 장경일(張敬一)이다. 프랑스의 르망 교구 출신인 장 주교는 1837년에 사제가 되었고 동양의 선교 지역인 베트남으로 건너갔다가 2년 동안 옥살이를 치렀다. 그 뒤 만주 요동 지역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였고,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 3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깊은 신심과 신학을 겸비한 장 주교는 이 땅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하면서 배론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서울에 인쇄소 두 곳을 설립하는 업적을 남겼다. 또한 당뇨병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목에 힘쓰면서 여러 지역의 교우들을 열심히 돌보았다. 1866년 2월 23일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앞무릎에 곤장 열 대를 맞고도 고통스러운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며, 3월 7일 백 유스토, 서 루도비코, 김 헨리코 신부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Hot
김 율리에타
관리자
0
0
0
3160
2017.01.17
신분: 궁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동정 순교자인 김 율리에타는 시골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부모와 함께 서울로 이사와 살면서, 17세 때 혼담이 있었으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 잘라 버렸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모는 냉담하여 낙향하였으나, 김 율리에타는 혼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혀 10년 동안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궁에서는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없어 궁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서 일을 해 주며 품삯을 모아 집을 마련하고, 혼자 살면서 신앙 생활을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고 또 늘 언행에 조심하였으며 그래서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 하지 않을 여인’이라고 불렸다. 기해박해가 있던 1839년 7월에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이겨 낸 끝에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56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Hot
남종삼 요한
관리자
0
0
0
3161
2017.01.17
신분: 승지순교일: 1866-03-07관련성지: 서소문 밖남종삼은 충청도 충주(忠州)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군수가 된 남종삼은 항상 재물과 부녀자를 멀리하고 청백리(淸白吏)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관직에 따르는 미신행위로 인해 한때 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교회로 돌아와서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던 중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제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 이유일(李惟一)등과 논의 하여 영불(英佛)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장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 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장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자신의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고양군 축베더리로 피신했으나 2월 25일 주교의 하인 이선이(李先伊…
Hot
이영희 막달레나
관리자
0
0
0
3168
2017.01.17
신분: 동정순교일: 1839-07-20관련성지: 서소문 밖동정 순교자 이영희는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친정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권면으로 어머니 허계임, 언니 이정희와 함께 어린 나이에 입교하였다. 성장하면서 동정을 지킬 것을 결심하여 혼기에 이르자 혼담을 피해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꾸미고 상경하여, 이매임과 함께 살며 신앙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김성임, 김 루치아,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수한 뒤, 포청과 형조에서 일곱 번 형문(刑問)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7월 2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3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Hot
김효임 골룸바
관리자
0
0
0
3171
2017.01.17
신분: 동정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동정 순교자 김효임은 서울 근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뒤 전 가족이 입교하고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김효임은 두 여동생과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던 중, 1839년 4월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자매는 포청에서 이른바 학춤이라는 혹형 외에도 달군 쇠붙이로 열세 군데나 지져대는 혹형을 받았고, 또 옷 벗긴 채 남자 죄수 방에 넣어졌으나 갑자기 두 자매의 몸에 신비스런 힘이 생겨 남자 죄수들이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김효임은 형조판서의 신문에 영리하고 겸손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과 싸우며 지내던 김효임은 9월 26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2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Hot
현석문 가롤로
관리자
0
0
0
3172
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46-09-19관련성지: 새남터현석문은 서울 중인 계급의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가족이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1839년에 회장으로 임명된 현석문은 박해가 끝난 뒤 순교자들의 기록을 정리한 「기해일기」를 펴내었고, 포졸들에게 쫓기면서도 이름을 바꾸어 가며 각지에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가 격려하였다. 한편 중국 교회에 밀사를 보내고, 1845년에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뒤 김 신부의 집에 남아 있던 여교우들을 새로 마련한 집에 피신시키고 자신도 그 집에 숨어 있다가 7월 11일에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뒤에도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며 지내다가 마침내 9월 19일 50세의 나이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Hot
최창흡 베드로
관리자
0
0
0
3175
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39-12-29관련성지: 서소문 밖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최창흡은 어려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형 최창현(崔昌顯)이 순교한 뒤로는 외교인과 다름없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서른 살쯤 교우인 손소벽(孫小碧)과 혼인한 뒤로는 다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졌을 때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고 이 때부터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창흡은 순교를 결심하였고, 6월 친정으로 피신해 온 딸 최영이(崔榮伊)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사위 조신철(趙信喆)이 맡겨 둔 교회 서적과 성물 때문에 포청에서 혹형을 받았으나 잘 참아 냈다. 형조에서도 여러 차례의 고문을 이겨 내고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Hot
볼리외 루도비코
관리자
0
0
0
3175
2017.01.17
신분: 신부순교일: 1866-03-07관련성지: 새남터‘볼리외’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서 루도비코 신부의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서 신부는 1840년 프랑스 보르도 교구에서 태어나 1864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에 백, 김, 민 신부와 함께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해성사를 줄 만큼 한국말을 배운 뒤 공주 지방의 전교를 맡았지만, 임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겨를도 없이 박해를 맞았다. 서 신부는 장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의 교우 집에 숨어 있었지만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잘 참아 내었고 여러 질문에도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하였다. 마침내 그 해 3월 7일에 동료 신부들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Hot
박큰아기 마리아
관리자
0
0
0
3181
2017.01.17
신분: 부인순교일: 1839-09-03관련성지: 서소문 밖박큰아기 마리아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궁녀인 동생 박희순의 권면으로 입교하였다. 1839년 4월 15일 동생과 함께, 피신해 있던 전경협의 집에서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견디어 냈다. 동생 박희순이 순교한 지 100여 일이 지난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는 54세였다.
Hot
정정혜 엘리사벳
관리자
0
0
0
3193
2017.01.17
신분: 동정녀순교일: 1839-12-29관련성지: 서소문 밖동정 순교자인 정정혜는 정약종(丁若鍾)의 딸로, 네 살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로 전가족이 함께 체포되어,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丁哲祥)은 순교하였으나 정정혜는 어머니 유 체칠리아, 오빠 정하상(丁夏祥)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 뒤 마재의 삼촌 정약용(丁若鏞)의 집에서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친척들의 구박과 냉대를 아름다운 덕행과 인내로 극복하고, 박대하던 몇몇 친척들까지 입교시켰다. 1839년 7월 11일 기해박해 때 정정혜는 서울에서 어머니,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대의 곤장을 맞았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킨 뒤에 12월 29일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 때 나이 43세였다
Hot
전장운 요한
관리자
0
0
0
3194
2017.01.17
신분: 상인순교일: 1866-03-09관련성지: 서소문 밖‘승연’으로도 불렸던 전장운은 서울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혹형과 고문을 참지 못하여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그 뒤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것을 뉘우쳤지만, 사제가 없어 고해성사를 받을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한 신앙 생활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혼인하여 3남매를 두었다. 1866년 초 장 주교의 명으로 교회 서적 출판에 참여하여 최형, 임치화를 도와 판각(板刻)을 마련하는 일을 맡았으나, 얼마 뒤 병인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고 교회 서적들이 적발되는 바람에 전장운도 3월 1일에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가혹한 형벌을 받은 뒤 3월 6일에 형조로 이송되었고, 3월 9일에 사형을 선고받아 그 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6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Hot
최경환 프란치스코
관리자
0
0
0
3200
2017.01.17
신분: 회장순교일: 1839-09-12관련성지: 옥사최경환은 충청도 홍주(洪州) 지방 다랫골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한국 교회의 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곳을 찾아 다니다가 가족들을 설득하여 서울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金城), 경기도 부천을 거쳐 과천(果川)의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건설하였다. 1836년 아들 최양업(崔良業)을 나(모방) 신부에게 보내어 마카오에서 신학 공부를 하게 했다. 1839년 초에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고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돌보던 중 7월 31일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동리 교우와 가족 등 4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수리산에서 서울의 포청까지 끌려간 최경환은 2개월 동안 하루 걸러 형벌과 고문을 당하여 태장 340대, 곤장 110대를 맞았다.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대를 맞고는 그 이튿날 옥사, 3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Hot
이 바르바라
관리자
0
0
0
3201
2017.01.16
신분 : 동정녀순교일 : 1839-05-27관련성지 : 옥사이 바르바라는 독실한 구교우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서울 청파동에서 이영희, 이정희 두 이모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4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체포되어 포청에서 신문을 받은 뒤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 어린 것이 요물이라 하여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하였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다시 포청으로 송환되었다. 포청에서 이 바르바라는 전보다 훨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으나 꿋꿋이 참으며 함께 갇혀 있는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함으로써 15세의 어린 나이로 순교하였다.
Hot
박후재 요한
관리자
0
0
0
3203
2017.01.17
신분: 상인순교일: 1839-09-03관련성지: 서소문 밖‘명관’으로도 불리던 박후재는 경기도 용인 지방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를 여읜 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성장하면서 물장사를 하는 노모를 도와 짚신과 미투리를 팔아 생활하였고, 36세 때 교우 처녀와 결혼하였다. 1839년 5월 아내를 피신시키고 혼자 체포된 박후재는 포청에서 치도곤 40대를 맞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였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 피가 낭자하게 흘렀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함께 갇힌 교우들을 권면하고 또 흉악한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하였다. 이어 형조로 이송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박후재는 9월 3일 다섯 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41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Hot
조신철 가롤로
관리자
0
0
0
3209
2017.01.17
신분: 마부순교일: 1839-09-26관련성지: 서소문 밖‘덕철’(德喆)로도 불리던 조신철은 강원도 회양(淮陽)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또 아버지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탕진하자 출가하여 한때 스님이 되었으나 23세 때 동지사(冬至使)의 마부가 되었으며, 30세 쯤에 유진길(劉進吉), 정하상(丁夏祥) 등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북경에서 세례, 견진, 고해, 성체성사를 받고 계속 동지사의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 연락을 취하며 나 베드로(모방) 신부, 정 야고보(샤스탕) 신부, 범 라우렌시오(앵베르) 주교 등을 입국시키는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조신철은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6월 어느날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가 자수하였다. 신문 중 그는 처가에 숨긴 성물과 성서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고, 형리들은 주교와 신부들의 은신처를 대라며 그에게 더욱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9월 26일, 45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초기화
날짜순
조회순
추천순
방문순
조회순
검색
1
2
3
4
5
6
7
Search
검색대상
제목
내용
제목+내용
회원아이디
회원아이디(코)
글쓴이
글쓴이(코)
또는
그리고
검색어
필수
검색
닫기
Login
Login
자동로그인
회원가입
|
정보찾기
with Social Login
Category
Guide for Scheduling
Korea Martyrs Shrine
Overseas Korean Martyrs
Korean 103 Saints
Korean 124 Blessed
Catholic History
Pilgrimage News
+
Posts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1) 천국 닮은 공동체 일궜던 서지마을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20) 신자들을 위해 만든 천주가사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9) 1856년 9월 13일 소리웃에서 보낸 열두 번째 서한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8) 최양업 신부 가족들이 살았던 수리산 성지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7) 최양업 신앙의 뿌리를 찾다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6) 1855년 10월 8일 배론에서 보낸 열한 번째 서한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5) 배티성지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4) 배티 신학교에서 피어난 조선인 사제에 대한 희망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3) 멍에목 성지
06.13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12) 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보낸 열 번째 서한
+
Comments
글이 없습니다.
State
현재 접속자
105 명
오늘 방문자
765 명
어제 방문자
2,673 명
최대 방문자
5,379 명
전체 방문자
1,707,850 명
전체 게시물
1,336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