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7) 디오라마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셀주크의 승리와 장악, 십자군 전쟁의 불씨가 될 줄이야

Pilgrimage News 성지순례 뉴스
홈 > Knowledges > Pilgrimage News
Pilgrimage News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7) 디오라마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셀주크의 승리와 장악, 십자군 전쟁의 불…

관리자 0 997 0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17) 디오라마의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

셀주크의 승리와 장악, 십자군 전쟁의 불씨가 될 줄이야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1071, Bataille de Manzikert), 이스탄불 군사박물관, 터키.

 

 

아랍 무슬림의 성장, 성지 팔레스타인의 상실

 

5~9세기 서방에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과거 서로마 제국의 영토가 회복되고 유럽의 주요 왕국들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며 그리스도교를 구심점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형성되고 있을 때, 비잔틴 동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에서는 서서히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7세기 아랍 무슬림이 성장하면서 비잔틴 제국은 그들과의 지속적인 전쟁에서 이집트, 시리아는 물론 팔레스타인까지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팔레스타인의 상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알다시피 팔레스타인은 ‘성지’(Terra Santa)다.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복음을 전하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이후 잠시 마케도니아 왕조가 부흥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토는 다시 회복되는 듯했으나, 10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8세와 9세를 거치면서 제국은 안으로는 내란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해 허약해졌다.

 

그 시기, 비잔틴 동쪽에는 셀주크 튀르크(Seljuk Turks)족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원래 튀르크족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돌궐(突厥)로 중앙아시아의 스텝을 누비던 유목 민족 중 하나였다. 그들은 당나라에서 중앙아시아로 밀려와 살며, 거기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1045년에 이란으로 내려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셀주크라는 왕국을 건설하고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차례로 장악했다. 그리고 그들은 소아시아의 곡창지대 아나톨리아 반도를 넘보았고, 이 때문에 동로마 비잔틴 제국과 충돌했다.

 

 

셀주크와 비잔틴 제국 간의 싸움

 

소개하는 작품은 터키의 이스탄불 군사박물관(Asker Mze)에 있는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다. 이 작품은 특정 장면이나 풍경을 일정 공간 안에 입체적으로 전시한 디오라마(Diorama) 작품이다. 무대 장치적인 원근법과 조명 연출에 의한 3차원의 전시 방법으로, 주로 역사적 사건이나 자연 풍경, 도시 경관 등을 제작하여 교육용, 오락용으로 활용된다.

 

작품이 소장된 이스탄불 군사박물관은 거의 1000년에 이르는 터키군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1950년 오스만 제국의 전 육군사관학교 건물에 개관했다. 박물관은 22개의 전시실에 9000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각종 대포와 군인, 갑옷, 투구, 검류, 총기류, 오트만 메테르 밴드(군악대) 등이 있는 사이에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던 그들의 조상들을 그린 작품이 있다. 소개하는 작품도 그중 하나다. 13세기 말 이후 소아시아(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슬람 국가 오스만 제국(1299∼1922)의 토대가 되었던 셀주크 튀르크의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1071년 8월 26일, 터키 동부 만지케르트(Manzikert)라는 곳에서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과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Romanus IV Diogenis 1068~1071)가 부딪힌 싸움이다. 이 전쟁은 결국 셀주크의 승리로 끝났고, 과거 로마 제국의 정통 후예라는 비잔틴의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그 결과 술탄은 아나톨리아가 포함된 소아시아 전체를 장악한 패주가 되었고, 비잔틴과 터키의 운명이 여기서 갈렸다.

 

이를 계기로 셀주크는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비잔틴을 괴롭히면서 예루살렘 성지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급기야 1096년 비잔틴의 황제는 서방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고, 이것이 그 유명한 십자군 전쟁의 발단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1096∼1270년까지, 200여 년간 10차례에 걸쳐 벌어진 것으로, 서방 교회 입장에서는 7세기에 이미 경험한 바, 당시로써는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적으로 한 명분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다.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서 십자군 전쟁의 서막과 관련한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20세기 교황님들의 가르침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런 아픈 역사를 겪으면서 나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비잔틴 제국의 치욕스러운 패배

 

당시 상황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만지케르트 전투’의 주인공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이다. 그는 1063년 30대 초반의 나이에 술탄이 되어 중동 전역을 누비며 전투를 했고, 동로마 영내인 카파도키아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하기도 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동부 전선인 아나톨리아 지방까지 공격했고,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를 손에 넣었다. 나이는 많지 않아도 전장에서만큼은 백전노장인 셈이다.

 

한편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는 그런 술탄을 야만족의 족장이라며 하찮게 보았고, 그의 군대를 떠돌이 유목 집단에 불과한 오합지졸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들의 습격을 받고 약탈을 당한 아르메니아 지방을 평정하고자 별렀다. 1071년 봄, 드디어 황제는 군대를 모아 유프라테스 강 상류의 남쪽 지류를 따라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튀르크 사람들로 구성된 비잔틴의 용병부대는 만지케르트 입구에서 둘로 나뉘어 일부는 반(Van) 호수 옆 아클라트 요새로 향했고, 나머지는 황제와 함께 만지케르트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2만 명이 넘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상비군인 타그마타(Tagmata)는 싸우기도 전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버렸고, 힐라트(khilat)로 가는 길을 탐색하러 간 500명 넘는 노르만 용병도 도망가 버렸다. 또 1000명이 넘는 튀르크인 용병들은 셀주크인 친척들과 접촉한 후 달아나 버렸다. 첫 전투가 시작된 1071년 8월 25일 이전에 이미 로마누스의 군대는 절반 이상이 사라진 셈이었다. 비잔틴 군대의 이런 상황을 간파한 술탄은 마지막으로 평화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황제는 제국을 침략하는 것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보여주겠다며 이를 거절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술탄은 비잔틴군과 거리를 두고 유목민 특유의 동물적 감각으로 적의 동태를 살폈다. 셀주크군은 4km 떨어진 곳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비잔틴군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목표물이 그들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초승달 모양의 진형 중앙은 양쪽 끝에서 적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동안 뒤를 터 주었다. 중앙을 지나가는 사이에 비잔틴군은 셀주크 궁수들에 의해 치명적인 피해를 당하였다. 이에 기병대를 동원하여 셀주크를 압박하자, 그들은 초원의 전사답게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했다.

 

밤이 되자 결국 로마누스는 군대에 퇴각을 명령했고, 배후에서 잔여 병력을 담당하고 있던 장군 안드로니쿠스 두카스는 패전의 기미를 느껴 황제군의 퇴각을 돕는 대신 만지케르트 전장을 벗어나 부하들과 함께 달아났다. 비잔틴군은 큰 혼란에 빠졌고, 황제의 좌우에 있던 군대도 조금 버티다가 곧 퇴각하고, 결국 황제의 친위대와 2000~3000명의 튀르크 용병들만 셀주크 군에 포위된 채 싸웠다.

 

어느 순간, 전장에는 황제 혼자만 덩그러니 적군에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일부 비잔틴군이 황제를 발견하고 달려갔지만, 셀주크군이 나타나자 그마저 도망치고 말았다. 로마누스는 부상을 당했고, 셀주크군의 포로가 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갔다. 술탄은 자리에서 일어나 로마누스의 목에 자신의 신발을 묶고 땅에 입을 맞추게 했다. 튀르크족이 승리를 축하하는 의식이었다.

 

술탄은 황제를 일주일간 포로로 붙잡아 두며 정중하게 대접했고, 전투 전에 제안한 평화조약을 다시금 꺼내 들었다. 이미 포위된 안티오키아, 에데사, 히에라폴리스와 만지케르트를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로마누스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풀려났다.

 

그러나 그 사이에 비잔틴 제국은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에 요하네스 두카스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로마누스는 전쟁에서 굴욕스럽게 패했다는 이유로 제국에서 더 이상 황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길로 쫓겨났다. 그 결과 술탄과의 협상은 무산되고,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튀르크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작품 속으로

 

작품의 배경은 만지케르트 구릉이다. 전쟁의 시점이 한여름인 8월 26일이지만, 모든 생명이 죽은 듯 배경은 흙빛이다. 몇몇 포로들과 함께 황제만 덩그러니 술탄과 적에 둘러싸여 있다. 앞의 주인공들 외에 주변은 멀건 가깝건 모든 것이 피폐할 뿐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9월 13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f/f9/Manzikert.jpg



0 Comments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61 · 끝) 페르난도 보테로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향해서’

댓글 0 | 조회 810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61 · 끝)페르난도보테로의‘제2차바티칸공의회를향해서’20세기교회의변화·쇄신향해담대한발걸음내딛는요한23세-페르난도보테로,‘제2차바티칸공의회를향해서’(1… 더보기
Hot

인기 [세계]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60: 피에트로 카노니카의 베네딕토 15세 교종 기념비

댓글 0 | 조회 778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60)피에트로카노니카의‘베네딕토15세교종기념비’국경 · 민족초월해인류애선물한베네딕토15세교종-피에트로카노니카,‘베네딕토15세교종기념비’(1928년),성…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9) 프리드리히 스팀멜의 ‘하느님의 교회를 인도하는 레오 13세’

댓글 0 | 조회 858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9)프리드리히스팀멜의‘하느님의교회를인도하는레오13세’‘보편적인권’이라는새로운길로교회를이끌다-프리드리히스팀멜,‘하느님의교회를인도하는레오13세’(1903…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8) 루크 필즈의 ‘노숙자 임시 수용소 입소 허가를 기다리는 지원자들’

댓글 0 | 조회 760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 (58)루크필즈의‘노숙자임시수용소입소허가를기다리는지원자들’‘새로운사태’산업화의그늘,추위와굶주림에시달리는빈민들-루크필즈,‘노숙자임시수용소입소허가를기다리는…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7)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댓글 0 | 조회 1,005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7)밀레의‘이삭줍는여인들’목가적풍경이면에담겨진19세기농민들의팍팍한삶-밀레,‘이삭줍는여인들(LesGlaneuses)’,1857년,오르세미술관,프랑스파리…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6) 무명화가의 삽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비오 9세 교황’

댓글 0 | 조회 815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6)무명화가의삽화‘제1차바티칸공의회를소집한비오9세교황’세속권력은잃고교황의영적권위를얻은공의회-칼벤징거저,「1873년비오9세교황에관해서」에나오는‘1869…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5) 프란체스코 하예즈의 ‘입맞춤’

댓글 0 | 조회 1,116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5)프란체스코하예즈의‘입맞춤’‘작별키스’에담긴숨은뜻은19세기이탈리아통일의지-프란체스코하예즈,‘키스’(1859년),브레라피나코테크소장,이탈리아밀라노.이…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4) 프란체스코 포데스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 선포’

댓글 0 | 조회 888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4) 프란체스코포데스티의‘복되신동정마리아의원죄없으신잉태교의선포’비오9세교황‘원죄없이잉태되신성모교리’반포하다-프란체스코포데스티,‘복되신동정마리아의원죄없…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3) 필립 자크 반 브리의 ‘로마 공회장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

댓글 0 | 조회 820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3) 필립자크반브리의‘로마공회장을방문하는그레고리오16세’로마황제개선문아래극빈촌을찾은교황-필립자크반브리,‘로마공회장을방문하는그레고리오16세’(1832년…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2)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댓글 0 | 조회 886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2) 자크루이다비드의‘나폴레옹의대관식’대관식에서직접왕관을쓰는나폴레옹,교황은허수아비일뿐-자크루이다비드,‘나폴레옹의대관식’(1805~1807년),프랑스루…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1) 조셉 셀레스틴 프랑수아의 ‘1801년의 종교협약 비유’

댓글 0 | 조회 708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1)조셉셀레스틴프랑수아의‘1801년의종교협약비유’프랑스혁명정부의기세에밀려불리한조약을맺는교황청-조셉셀레스틴프랑수아,‘1801년의종교협약비유(Allego…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0) 펠리체 자니의 ‘연맹 축제를 위해 성 베드로 광장에 차려진 조국의 제단’

댓글 0 | 조회 736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50)펠리체자니의‘연맹축제를위해성베드로광장에차려진조국의제단’로마까지삼켜버린프랑스혁명의불길-펠리체자니,‘연맹축제를위해성베드로광장에차려진조국의제단’,179…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9) 자크 루이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댓글 0 | 조회 854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장면](49)자크루이다비드의‘호라티우스형제의맹세’프랑스혁명의폭풍전야에그린로마영웅사,신고전주의를열다-자크루이다비드,‘호라티우스형제의맹세’(1784년),유화,루브르…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8) 자코모 조볼리의 ‘성 빈센트 드 폴의 설교’

댓글 0 | 조회 907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48)자코모조볼리의‘성빈센트드폴의설교’사랑의혁명가,소외된이들에게십자가의빛을비추다-자코모조볼리,‘성빈센트드폴의설교’(1737),룬가라의코르시니궁(Pala… 더보기
Hot

인기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47) 바치챠의 ‘예수 이름의 승리’

댓글 0 | 조회 851 | 추천 0
[명작으로보는교회사한 장면](47)바치챠의‘예수이름의승리’예수님이비추는찬란한황금빛이모두에게-바치챠,‘예수이름의승리’(1685년),예수성당내중앙본당천장,이탈리아로마.트렌토공의회는여러… 더보기
Category
글이 없습니다.
State
  • 현재 접속자 75 명
  • 오늘 방문자 451 명
  • 어제 방문자 1,928 명
  • 최대 방문자 5,379 명
  • 전체 방문자 1,665,110 명
  • 전체 게시물 1,336 개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