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1) 도미니크 파페티의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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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1) 도미니크 파페티의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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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1) 도미니크 파페티의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

최후의 전투, 성벽과 함께 완전히 무너져내린 십자군

 

 

도미니크 파페티,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 1845년, 캔버스 유화, 베르사유 궁전 컬렉션, 프랑스.

 

 

십자군 전쟁은 서구 교회사 입장에서 본다면, 동방 교회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성지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에 대한 서구 세계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을 되돌려, 앞서 살펴보았던 곳으로 가보자. 안티오키아 공성전에서 승리한 십자군은 곧이어 예루살렘으로 향했고, 힘든 공성전 끝에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탈환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것을 유지하는 것인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탈환 후 대부분 십자군은 귀국하고 성지에는 예루살렘 왕국이 건설되었다.

 

 

이슬람의 반격과 전세 역전

 

그러나 끊임없는 이슬람 측의 반격으로 12세기 이후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1187년 십자군은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 군대에 패해 예루살렘을 빼앗겼다. 이에 유럽의 3대 군주(독일 황제, 프랑스 왕, 영국 왕)가 최대 규모의 십자군을 이끌고 성지로 향했으나 고령의 독일 황제는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죽고, 프랑스 왕은 중간에 귀국해 버리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제3차 십자군 원정)

 

제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점령’으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날의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서쪽에 있는 항구도시 아크레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1200년대 중반부터 카이사리아, 하이파, 아르수프, 종국에는 갈릴리까지 이스라엘 영토 대부분이 술탄에게 함락되고, 지난번에 차지했던 안티오키아도 1268년에 도로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그리스도교 영토들이 계속해서 함락되자, 유럽의 국가들은 십자군을 돕기 위해 다시 군대를 징집하고자 했다. 1270년 프랑스의 루이 9세는 군대를 이끌고 튀니지로 갔고, 1271~1272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공작(후에 에드워드 1세)은 제9차 십자군을 이끌었으나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이슬람 군대와 맞서기에는 전세가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져 있었다. 1278년 라타키아가 함락되고, 1289년 트리폴리 함락된 것이 그 예다. 술탄은 이제 아크레 정복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복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대규모 십자군을 결성하기 위해 몇몇 장수들에게 군사적 열정을 독려했으나 허사였다. 교황 주변에서는 유럽 제후들의 탐욕과 불성실과 성직자들의 타락이 십자군 결성의 장애요인이라는 불만 섞인 말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이런 요인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인 장애요인이라고 하기에는 십자군의 이상이 스스로에 의해 타락한 점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아무튼, 교황과 일부 제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099~1291년까지 십자군 원정 동안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그리스도교 국가 ‘예루살렘 왕국’은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하며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그 사이, 몽골 민족까지 서진하는 바람에 전쟁은 삼파전으로 전개되었다. 1285년부터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있던 앙리 2세는 거주지를 키프로스 섬으로 옮기고 집사를 유럽에 보내 유럽의 군주들에게 동지중해(Levant)의 위험을 알렸다. 니콜라오 4세 교황과 함께 유럽의 제후들에게 성지회복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도 보냈다.

 

하지만 각국은 자기네 이익을 챙기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아라곤 왕조는 시칠리아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고, 신성로마제국은 대공위 시대(Interregnum, 1254/1256~1273)를 맞고 있었으며, 20년 전 십자군을 이끌었던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집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성지 회복에 대한 열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1289년, 술탄 콸라운은 이슬람 군대를 이끌고 아크레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크레 공격을 목전에 두고 사망했고, 군대는 그의 아들 알 아시라프 칼릴이 지휘봉을 잡았다. 1291년, 드디어 무슬림은 십자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도시 아크레(Acre)를 공격했다. 몽골 민족과 ‘이집트의 무슬림(맘루크)+셀주크 투르크’와 십자군이 뒤엉켜 지난 200여 년간의 십자군 전쟁을 (거의) 종식하는 최후의 전투를 시작했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도미니크 루이 페레올 파페티(Dominique Louis Ferrol Papety, 1815~1849)가 그린 1845년 작품 ‘1291년 아크레를 방어하는 기욤 드 클레르몽’이다. 베르사유 궁전 내 프랑스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미니크 파페티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나고 죽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가다. 부친은 비누 제작자였지만, 아들이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오귀스탱 오베르(1781~1847)에게 보내 그림을 배우게 했다. 1835년 그는 파리의 에콜데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등록하여 레옹 코니에(1794~1880)와 함께 공부했다. 1837~1842년에는 로마의 빌라 메디치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스승 앵그르(1780~1867)는 “그가 붓을 잡았을 때, 그는 이미 마에스터였다”고 했다. 그의 첫 번째 살롱 전시회는 1843년에 있었다.

 

1846년 4~8월, 골동품 감정가며 수집가인 사바띠에와 그리스를 여행하며 아토스 산의 23개 수도원을 방문했다. 여행 중에 작성한 수백 개의 그림과 메모와 수집한 자료들은 그리스의 관습, 풍경, 지역의 문화재와 풍습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파페티로 하여금 기자, 민족학자 및 고고학 분야의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만들었다. 그 자료들은 또 일종의 보고서 형태로 재편집되어 「비잔틴 회화와 아토스 수도원(Les peintures byzantines et les couvents de l‘Athos)」(1847년)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것은 정기 간행물 「르뷔데되몽드(Revue des Deux Mondes)」의 토대가 되었고, 파리의 판테온 장식에도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849년, 다시 찾은 모레아(필로폰네소스)에서 콜레라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34세였다.

 

이 작품은 1842년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1세 국왕(재위 1830~1848)이 베르사유 역사박물관에 소장하기 위해 파페티에게 의뢰해 완성한 작품이다.

 

 

아크레 함락, 역사의 오점

 

다시 전투로 돌아가서 당시 아크레에는 4만 5000여 명의 주민이 있었고, 십자군과 십자군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 왕 앙리 2세가 보낸 군대까지 모두 1만 60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3만~7만 명 규모의 무슬림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십자군 측 주력 병력은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 템플기사단, 성 토머스기사단, 튜튼기사단, 성 요한기사단 등 기사단 병력 1000명 정도였다.

 

초반에는 기사단의 적극적인 저항과 응전으로 전투를 주도하는 듯했다. 기사단에 의해 성벽은 잘 방어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점차 성탑들이 하나씩 무너지며 기사단장들이 중상을 입거나 사망 혹은 도망가는 바람에 전투 시작 6주 만인 5월 18일, 결국 아크레는 함락되고 말았다.

 

아크레가 함락됨에 따라 십자군에 참가한 많은 군인은 해로를 통해 키프로스로 도망가거나 붙잡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십자군에 참가한 국가들은 이후 중동에 발을 디디지 못했고, 성지의 어느 곳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후에도 십자군의 이름으로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기는 했으나 누구도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아무런 실익 없이 숱한 인명만 희생시킨 채 역사에 오점만 남기고 종식되었다.

 

 

그림 속으로

 

십자군은 아크레 성벽에서 이슬람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다. 흔히 ‘몰타 기사단’으로 알려진 성 요한기사단의 원수 기욤 드 클레르몽이 선두에 서서 성을 방어하고 있다. 허물어지고 있는 성벽 아래는 무슬림 병사들의 시신이 켜켜이 쌓여있다. 십자군의 승리를 바라는 듯 그들이 방어하고 있는 성벽도 뒤로 겹겹이 튼튼하게 서 있다. 밝은색 톤의 뒤에 포개진 성벽들은 마치 현실의 성벽이 아닌 것 같다. 앞에 무너지고 있는 성벽만이 현실처럼 다가온다. 화창한 날씨는 역설적이게도 이 전투가 십자군의 마지막 싸움을 예고하는 듯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0월 18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archive/1/1b/20200520201541%21SiegeOfAcre129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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