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7) 조르조 바사리의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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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7) 조르조 바사리의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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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27) 조르조 바사리의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70년 만에 본향 로마로 돌아온 교황, 환영하는 양떼들

 

 

조르조 바사리,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1572/73, 교황청 접견실 Sala Regia, 바티칸.

 

 

프랑스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재위 1294; 1295~1303년) 이후 복자 베네딕토 11세 교황(재위 1303~1304년)은 필리프 4세의 강력한 견제를 받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1305년 새 교황을 선출할 때 필리프 4세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앉혔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를 대변하듯 새 교황 클레멘스 5세의 즉위식은 로마가 아닌 리옹에서 있었다. 1309년 필리프 4세는 위험한 로마보다 안전한 아비뇽의 주교관에 거주하라며 교황을 압박했다. 이로써 클레멘스 5세 교황은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겼고, 1377년까지 일곱 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교황청을 두고 지내게 되었다.

 

클레멘스 5세 교황을 기점으로 추기경의 절대다수는 프랑스인이었고, 자연히 그들의 목소리는 우위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아비뇽 체류 시절,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교회 요직은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도맡았다. 아비뇽 교황은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년), 요한 22세(재위 1316~1334년), 베네딕토 12세(재위 1334~1342년), 클레멘스 6세(재위 1342~1352년), 인노첸시오 6세(재위 1352~1362년), 복자 우르바노 5세(재위 1362~1370년), 그레고리오 11세(재위 1370~1378년)였다. 교황이 없는 로마는 하인리히 7세(1310~1313)를 시작으로 신성로마제국이 차지했고, 교황령에 속해 있던 지방들은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페라라와 우르비노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시기의 교황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아비뇽에 머문 일곱 교황

 

클레멘스 5세 교황은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발표했던 교황권 우위의 모든 칙령을 철회했고, 성지 순례를 떠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성전기사단’도 해체했다. 성전기사단이 막대한 부를 쌓고 프랑스 곳곳에 영토를 소유한 것에 불만을 품은 필리프 4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교황은 사사건건 프랑스 왕의 눈치를 살폈고, 왕은 교황이 엉뚱한 생각을 하면 가차 없이 새로 교황을 뽑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요한 22세 교황은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를 강화하고, 교황청 조직을 아비뇽판으로 재정비하며, 그것을 위해 재정 확충에 힘을 쏟았다. 권위적인 성품에 교회의 절대적인 재산 포기가 반드시 완덕의 생활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가난한 교회는 미래가 없다며, 교황청 수익을 증대시키고 자기 뜻에 안 맞으면 이단으로 단죄했다. 그러다 보니 ‘가난’의 영성을 사는 프란치스코회는 눈엣가시였다. 프란치스코회의 영성가들은 물론 신성로마제국 루트비히 4세 황제와 가장 많은 마찰을 빚었다.

 

베네딕토 12세 교황은 시토회 출신으로 선임 교황과는 달리 개혁을 도모했다. 로마나 볼로냐로 교황청을 옮기려고 했으나 프랑스 추기경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하고 아비뇽에 주저앉았다. 그는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 수도회들을 단속하고자 회칙을 더 엄격하게 개정하도록 했고, 재속 사제들의 생활 규범을 제시하며 학문 증진을 독려했다. 루트비히 4세와는 마찰을 좁히지 못했으나, 프란치스코회와는 화해했다.

 

클레멘스 6세 교황은 베네딕도회 출신이다. 그는 루트비히 4세를 파문(1346년)하고, 카를 4세 선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모국인 프랑스에 대한 애정 때문에 피렌체 출신의 인문주의 시인 페트라르카와 로마 시민들의 로마 귀환 요청을 거절했다. 페트라르카를 성직자로 임명하고 가까이 두려고 했지만, 시인은 교황청의 부패와 로마를 떠나 있는 것에 크게 실망하고 아비뇽을 떠났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아비뇽을 고대 바빌론 유배에 비유하여 ‘서방의 바빌론’으로 묘사했다. 교황은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1343년 1월 27일 “100년에 한 번씩 지내던 성년을 50년에 한 번씩 지낸다”는 칙서 「하느님의 외아드님(Unigenitus Dei filius)」을 반포했다. 그리고 아비뇽에 새 경당을 지어 성 베드로 사도에게 봉헌했다. 또 재임 중에 유럽에 불어닥친 흑사병에 직면하여 환자 치료와 사망자 매장,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에 주력했다. 흑사병의 원인을 유다인에게 돌리고, 그들을 향한 집단 학살에 대해 교황은 폭력 사태를 규탄하며 칙서 「아무리 불충하더라도(Quamvis Perfidiam)」(1348년)를 반포, “전염병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에게 똑같이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며 성직자들에게 유다인 보호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인노첸시오 6세 교황은 아비뇽 시대의 다른 교황들과 달리, 프랑스 국익에 치우치지 않은 개혁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 교황이다. 카를 4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러주었고, 카를은 로마를 교황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요한 22세와 베네딕토 12세가 축적한 교황청 재산의 대부분을 선임 클레멘스 6세가 모두 소진하자, 교황청 관리인까지 감축하여 인건비를 아끼고, 미술품을 매각하는 등 재정 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공국 간의 전쟁과 흑사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그 돈마저 쓰는 바람에 극도의 가난한 생활을 했던 교황이었다.

 

우르바노 5세 교황은 아비뇽 시대 교황 중 유일하게 복자품에 오른 교황이다. 베네딕도회 출신으로 뛰어난 법률가기도 했던 그는 교황이 된 후에도 수도 규칙을 따르며 수도복을 입고 낮은 자세와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교황청 내부 관료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교회 쇄신을 단행했다. 그가 말한 교회 쇄신은 “복음의 가치와 원칙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지,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는 게 아니라”고 했다. 교육 사업을 후원하여 대학을 설립, 지원했고,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동ㆍ서방 교회의 일치를 도모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 귀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1367년 10월 16일, 교황으로서 또 로마교구의 교구장으로서 60년 만에 처음 자신의 교구를 찾았다. 목자 없이 60년을 지낸 로마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그러나 3년 후 1370년 프랑스 추기경들의 강압에 못 이겨 프랑스로 돌아갔고 얼마 후에 사망했다.

 

 

아비뇽 체류를 종식하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프랑스인이지만 아비뇽 체류를 종식한 교황이다. 추기경 시절, 이탈리아 페루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회와 수도원의 부패한 관행을 타파하고 개혁을 단행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의 호소와 충고를 듣고 로마 귀환을 결정했다. 그러나 피렌체가 제동을 걸며, 볼로냐, 페루자, 오르비에토, 비테르보 등 교황령 내 40개가 넘는 도시에 반란을 조장했다. 그에 대해 교황은 1376년, 피렌체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고, 반란을 진압하고 로마 환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1377년 1월 7일, 로마에 무사히 당도하면서 아비뇽 체류를 종식 시켰다.

 

 

르네상스, 매너리즘 화풍 이끈 대가

 

소개하는 작품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가 그린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이다. 바티칸 접견실 ‘Sala Regia’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바사리는 아레초 출신으로 르네상스, 매너리즘 화풍을 이끌었던 대가다. 화가, 건축가, 작가며 사학자이기도 했다. 16세에 실비로 파세리니 추기경에 의해 피렌체로 와서 안드레아 델 사르토와 그의 제자 로소 피오렌티노와 자코포 폰토르모 그룹에 합류했다. 이후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연구했다. 스스로 미켈란젤로 제자임을 자처했다.

 

피렌체 베키오 궁과 두오모의 돔 천장화, 우피치 미술관 건물, 바사리의 복도와 바티칸의 접견실 등 그가 남긴 회화와 건축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사학자로서 미술사적 문헌을 기초로 쓴 최초의 미술가 열전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생애」라는 방대한 책이다.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썼다. 미술의 역사는 이 책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비뇽 교황청은 성벽 높이가 50m, 두께가 4m나 되는 거대한 감옥 같은 성이었다. 이것은 프랑스 왕권이 교황권을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하나의 표상이었다. 교황들은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아비뇽의 포로’라고 했다. 한편, 교황이 없는 로마는 또 어떠했던가! 무법천지나 마찬가지였다. 콜라 디 리엔조가 민중을 선동해 봉기했고, 교황이 보낸 추기경 알보르노를 통해 회복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교황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어떤 개혁도 작동되지 않았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바로 이런 암울했던 아비뇽 시대 교황의 심리와 과거에서 벗어난 로마를 반영하듯, 애틋하게 표현되었다. 교황의 앞길은 하늘에서 내려온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인도하고, 백성들은 남녀노소 모두 나와서 근 70년 만에 돌아오는 목자를 환영하고 있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로마로 귀환했을 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런데도 바사리는 그를 폭삭 늙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아비뇽 생활의 고충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동시에 당신 양 떼들을 향한 연민의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2월 13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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