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0) 바크라프 브로지이크의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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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0) 바크라프 브로지이크의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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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0) 바크라프 브로지이크의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


혼란과 이단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교회

 

 

바크라프 브로지이크, ‘콘스탄츠 공의회의 얀 후스’(1883년), 프라하 구시가지 시청 내 브로지이크 홀 소장.

 

 

교회 분열의 후유증

 

교황청의 아비뇽 체류 후유증은 교회 안팎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의 로마 귀환 이후, 교황이 3명씩 나오는 초유의 사태를 겪는 동안 유럽의 지성계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을 거라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올바른 일을 묵묵히 찾아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교회를 강하게 비판하며 크게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도 있었다. 100년 후에 일어날 종교 개혁의 선구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파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개혁이 필요한 시대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도 ‘이단’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극단적이고 반교회적인 요소들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다. 이번에는 이들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반교회 운동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신학자며 종교 개혁가로 불리지만, 원래는 가톨릭교회 사제였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즈 칼리지를 졸업한 후, 발리올 칼리지에서 교수로, 켄터베리 칼리지에서 원장을 지냈다. 그는 가톨릭교회 교리의 핵심인 ‘실체 변화(transubstantiation)’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후 그가 제기하는 모든 반교회 운동의 근원이 되었다.

 

그는 1374년 세금 문제로 교황청과 잉글랜드 간 협상이 있을 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를 동행하여 사절단으로 아비뇽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교황도 영국 왕실도 문제가 많았고, 영국의 고위 성직자들은 부유했다. 성직자의 절반 이상이 사목에는 관심이 없고, 신학에는 무지했다. 그렇다고 마땅한 해결책도 없었다. 성직자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인구 65명당 성직자가 1명씩 있는 꼴이었다. 또 영국 교회가 유럽의 다른 나라 교회들보다 부유한 것도 문제였다. 영토의 3분 1일이 교회 소유였다. 위클리프가 보기에 수도회들도 위기였다. 수도자들은 돈이 많았고, 권위와 영향력을 앞세워 본래의 정신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그런 탁발 수도승들을 ‘새로운 이단자’로 규정했다. 백성들은 순례, 성인 유해 공경, 전대사 등으로 신앙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겉으로만 그렇다고 보았다.

 

위클리프는 세 가지 측면에서 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하고, 후원 시스템을 전면 수정해야 하며, 교회는 사목에만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막 아비뇽 시대를 청산하고 로마로 귀환한 교황청이 부패했다며 개혁을 주장했다. 가톨릭교회의 수도원 제도를 비난하고, 교황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과도한 비판으로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은 이단 행위를 멈출 것을 권고했으나, 그는 계속해서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교리에 공격을 가했다.

 

1382년,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백성에게 복음의 진리를 직접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 훗날 「위클리프 성경」으로 알려지게 될 바로 그 성경이다. 그때까지 성경은 예로니모 성인이 70인역에서 번역한 라틴어 성경이 전부였다. 따라서 라틴어를 아는 소수의 성직자만 성경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이에 위클리프는 성경이 “백성의, 백성에 의한, 백성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장은 훗날 링컨이 민주주의를 주장할 때 인용하기도 했다. 위클리프의 영어 번역은 히브리어와 희랍어 원문보다는 예로니모 성인의 라틴어 번역본 「불가타」를 기초로 했다. 성경의 영어 번역은 영국 내에서부터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바로 그해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교회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지진 때문에 조기에 종료되는 바람에 일명 ‘지진 회의’로 불리기도 한다. 대주교는 회의에서 위클리프가 주장한 10개 사안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14개 오류를 지적했다. 위클리프는 자신의 본당 루터워스에서 쫓겨났고, 2년 후에 사망했다.

 

 

체코의 얀 후스, 설교 금지 당해

 

그의 영향은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Jan Hus, 1372~1415)에게로 이어졌다. 후스는 프라하의 카렐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400년부터 교양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가톨릭교회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1402년, 카렐대학교 총장이 되자 체코인들에게 독일에 맞설 것을 독려했고, 체코어의 철자법을 개혁하여 저술 활동에 활용했다. 설교와 저술로 교회의 타락을 고발했고, 대사 규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본래의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고위 성직자와 독일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는 위클리프와 달리 대중 설교를 통해 개혁을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기도 했다.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선출된 알렉산드로 5세 교황은 교서를 통해 위클리프의 저술들을 단죄했고, 프라하 대주교에게 후스의 설교를 금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스는 교황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고, 훗날 프로테스탄트들이 들고 나올 문장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운명 예정설, 오직 성경·오직 은총, 베드로의 수위권 거부, 교황 권위의 무효 등을 주장했다. 교회는 거룩하지도 않고, 교회에 대한 순명은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교황청은 로마로 직접 와서 입장을 밝히라고 했고, 후스는 거부했다.

 

141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가 ‘콘스탄츠 공의회’를 소집하며,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는 조건으로 공의회 참여를 독려했다. 후스는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콘스탄츠 공의회는 그에게 30건의 고발 목록을 비준했고, 그의 저작 중 세 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틀간 해명할 기회를 주었다.

 

 

체코 대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크라프 브로지이크(Vclav Brok, 1851~1901)가 그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해명하는 얀 후스’이다.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 브로지이크는 젤레즈니함므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행히 이른 나이에 프라하 외곽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크면서 회화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 함께 성당에 다니던 친구의 아버지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주선해 준 덕분에 17살에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1871년에는 드레스덴 아카데미아, 1873년에는 뮌헨 미술원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뮌헨 미술원에 있는 동안 독일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칼 폰 필로티(1826~1886)을 만났고,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76년부터 파리에서 살며, 살롱 드 파리에서 금상을 받으며 파리 문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파리의 부유한 미술품 거래상 찰스 세델메예라의 딸과 결혼하며 엘리트 예술가로 이름을 올렸다. 1893년부터 프라하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하며, 프라하와 파리를 오갔다. 1896년 프랑스 미술 아카데미가 선정한 불멸의 화가 40인에 선정되었고, 죽을 때까지 파리 미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이름을 올린 첫 번째 체코인이 되었다. 말년에는 풍경화, 농민 중심의 인물화, 역사화에 집중했다. 갓 쉰을 넘긴 나이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은 파리의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있다.

 

 

그림 속으로

 

작품은 원래 브로지이크의 장인이 소장하고 있던 개인 소장품이었다. 작품 속에서 얀 후스는 옥좌에 앉아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기스문트 앞에서 왼쪽의 교황과 공의회 교부들에 둘러싸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교회는 그에게 이단으로 간주될 수 있는 사항들을 철회하라고 명했고, 후스는 거부했다. 그림 속 장면은 암울한 역사적인 순간을 말하는 듯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도, 후스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듯, 고딕 양식의 기둥 배경이 압도적이다. 결국, 후스는 이 자리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1415년 7월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의 제자 프라하의 지롤라모는 콘스탄츠로 달려와 지기스문트에게 약속과 다르지 않으냐고 따졌고, 그 역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얀 후스가 30년 전에 사망한 위클리프의 추종자였고, 후스의 이단 논문은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밝혀져 위클리프의 시신도 다시 파내 불에 태워졌다. 이로써 1414~1418년, 온 유럽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단 논란을 종식하는 동시에 지난 40여 년간 세 명의 교황까지 나와 유럽 교회를 흔들었던 서구 대이교 논란을 종식시킨 장(場)이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월 1일, 김혜경(세레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이탈리아 피렌체 거주)]

 

* 그림 파일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은 것입니다.

원본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7/76/Vaclav_Brozik_-_Hu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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