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3) 필립 자크 반 브리의 ‘로마 공회장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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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3) 필립 자크 반 브리의 ‘로마 공회장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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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53) 필립 자크 반 브리의 ‘로마 공회장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


로마 황제 개선문 아래 극빈촌을 찾은 교황

 

 

필립 자크 반 브리, ‘로마 공회장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1832년), 로마 박물관 소장.

 

 

나폴레옹과 정교 협약을 맺고, 그의 황제 대관식에도 참석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협을 시도하며 교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자 한 비오 7세 교황의 노력과 달리, 나폴레옹과 교회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나폴레옹이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위해 벌이는 전쟁과 대륙 봉쇄령에 반대하다가 포로생활까지 한 교황이지만,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여러 면에서 인도주의적인 자세를 보여줬고, 로마로 귀환한 후 예수회를 부활시키는 등 나름대로 소신 있는 교황으로서 면모를 아낌없이 보여줬다.

 

 

보수주의 교황들, 레오 12세 교황부터

 

친척인 비오 6세와 비오 7세 두 교황은 나폴레옹에 의해 힘든 재임 시기를 보내면서도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한 유럽 내의 변화의 물결을 일정 부분 수용하려는 태도도 보였다. 하지만 이후 레오 12세부터 비오 8세와 그레고리오 16세는 소위 ‘보수주의 교황들’로, 여러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사목 정책을 펼쳤다. 나폴레옹을 선두로 한 혁명 세력과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며,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세력들에 대한 반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오 7세의 뒤를 이을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는 26일간 지속됐다. 비오 7세 시절을 마무리하고 1814년 빈회의에서 교황령을 되찾아오며 교회 내 개혁을 선도하던 콘살비 추기경을 반대하던 보수파 추기경들은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스폴레토 출신의 안니발레 세르마테이 델라 젠가(Annibale Sermattei della Genga) 추기경을 제252대 교황, 레오 12세(재임 1823~1829년)로 선출했다. 그가 교황이 된 후 가장 먼저 발표한 칙서는 「첫 번째 장(場)(Ubi primum)」이다. 여기서 교황은 성직자들의 지적ㆍ윤리적인 교육과 규범을 강조하고, 위험한 교설에 반대할 것을 촉구했다. 국무성 장관 콘살비 추기경을 경질하고, 델라 소말리아 추기경을 그 자리에 앉혔다.

 

레오 12세는 교황령의 행정을 재정비해 성직자들이 통치하게 했고, 1826년 칙령으로 로마에 거주하던 유다인들을 게토에 한정해 살게 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비밀결사대들이 교황령 안에서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부추긴다고 생각해 출판 검열을 강화하는 등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강화했다.

 

 

비오 8세 교황, 프랑스와 좋은 관계

 

그의 뒤를 이은 교회법 학자 출신의 비오 8세 교황(재위 1829.03.31~1830.12.01)도 같은 기조를 이어갔다. 1800년 몬탈토의 주교가 된 후,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선서를 거부해 투옥됐고, 교황이 된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전례를 거행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가 전임 교황과 다른 것은 프리메이슨과 같은 비밀결사대들은 단죄했지만, 교황령의 행정에 대해서는 온건한 정책으로 경제ㆍ사회적 개선책을 펴나갔다는 점이다. 프랑스와의 관계도 좋아져서 프랑스에서는 반(反)가톨릭 법령이 철회되기 시작했고, 루이 필리프 왕은 가톨릭교회에 지원과 보호를 아끼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 조선대목구장 임명

 

비오 8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은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카말돌리 수도회 출신의 마우로 카펠라리(Mauro Cappellari)였다.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1846년)라는 이름으로 선출된 그는 강한 보수주의자며 전통주의자였다. 수도자 신분으로 있을 때인 1799년, 이탈리아 얀센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한 「성좌와 교회의 승리(Il trionfo della Santa Sede e della Chiesa)」라는 책을 집필해 출판했다.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배포됐다. 1805년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성 대(大) 그레고리오’ 수도원의 아빠스가 됐다. 그가 후에 교황명을 ‘그레고리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 20년 넘게 첼리노 언덕의 ‘성 대 그레고리오’ 수도원의 아빠스로 지냈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오 16세는 전기와 철도 같은 기반 기술 혁신도 반대할 만큼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교황령에 이런 현대 문명이 도입하게 되면, 교역량이 늘어 부르주아 계층이 권력을 갖게 되고,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요구가 급증해 결국 교황권은 위협받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도를 프랑스어로 ‘지옥으로 가는 길(chemins d’enfer)’이라고 불렀다.

 

그는 신학에 관심이 많아 성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을 옹호하며, 과거 잠시 포교성성 장관으로 있었던 탓인지 전교에도 관심이 많아 교황이 된 후 전교지의 여러 곳을 교황대리구 곧 대목구로 설정하고 성사 집행을 허락했다. 이 시기(1831년 9월 9일)에 조선 교회를 대목구로 설정해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조선대목구장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병으로 입국에 실패하고 앵베르 주교가 그의 뒤를 이었다. 같은 시기에 캐나다와 미국, 볼티모어에도 많은 교구가 설립, 재조정 되었다.

 

1831년 8월 5일, 그레고리오 16세는 헌장 「교회에 대한 관심(Sollecitudo ecclesiarum)」을 발표, 정치적인 입장과 상관없이 교황의 영적 권위는 훼손될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33명의 ‘하느님의 종’을 성인 혹은 복자품에 올렸고, 여러 수도회의 창설을 인가 혹은 지원해줬다. 개인적으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커서 이를 널리 장려하기도 했다. 1836년 11월 15일 그는 당시 교황령의 일부였던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고대 유물이 발굴되자 바티칸박물관 내에 ‘그레고리오 에트루리아관’을 신설하도록 했다. 1846년 6월 1일 급성 피부 감염병인 안면 단독(丹毒, erysipelas)으로 선종했다.

 

 

안트베르펜 출신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필립 자크 반 브리(Philippe Jacques van Bre, 1786∼1871)가 그린 ‘로마 공회장(포룸 로마눔, Forum Romanum)을 방문하는 그레고리오 16세(Gregorio XVI in visita ai Fori)’(1832년)다.

 

안트베르펜 출신의 작가 필립 자크는 친형인 마티아 이냐시오(Mattheus Ignatius van Bree, 1773∼1839)와 함께 그림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는 한편, 안트베르펜의 아카데미 교수로 있던 반 레게모터(Petrus Johannes van Regemorter)의 제자이기도 했다. 형제는 파리를 비롯해 유럽의 손꼽히는 도시들을 방문해 여러 화풍을 보며 견문을 넓혔다. 그 과정에서 프랑수아 앙드레 뱅상(Franois-Andr Vincent)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파리에 체류할 때는 다비드의 문하생 중 한 사람이었던 지로데 드 로시 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ussy-Trioson, 1767∼1824)의 스튜디오에도 자주 들렀다.

 

형 마티아는 1804년 안트베르펜으로 돌아왔지만, 필립 자크는 로마, 독일, 영국으로 여행을 계속했고, 파비아에서 몇 년간 체류하며 일하기도 했다. 그는 역사와 환상과 건축을 주제로 한 그림에 전념했다. 벨기에 정부는 그의 작품 중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의 내부 풍경(Veduta dell‘interno della basilica di San Pietro a Roma)’이라는 작품을 구매하면서 황금 메달을 수여하기도 했다. 벨기에 정부가 그의 작품 가격을 설정하기도 했다.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립 미술관(Museo reale delle belle arti del Belgio)의 학예사가 됐고, 1871년 생조스텐노드(Saint-Josse-ten-Noode)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로마 공회장(Foro Romano) 내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Arch of Titus) 아래서 지내던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고 있다. 당시 로마 공회장은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 지내던 일종의 촌락이었다. 유적지 안에 있던 고대의 신전들은 중세기를 거치며 순교자들을 위한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례자도 모여들었다. 교황의 이러한 사목적 행보는 교회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의미뿐 아니라 로마 백성의 군주로서 공적 외출을 한 것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작품에서는 오늘날 보기 힘든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 아래가 극빈자들이 사는 장소로 사용되고, 멀리 배경에 콜로세움이 있다. 개선문의 내부에 새겨진 부조와 바닥에 보이는 로마식 가도 형태가 로마의 역사 유적지라는 걸 입증하고 있다.

 

교황을 바라보고 우측에 있는 일행은 복음서를 손에 들고, 좌측에 있는 일행은 아기를 돌보는 부녀자들에게 성체를 분배하고 있다. 개선문의 우측 아래에는 순례자로 보이는 중년의 한 남성이 어린 양의 다리를 묶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교황에게 두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12일, 김혜경(세레나, 부산 가톨릭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동아시아복음화연구원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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