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김가항 성당 “김대건 신부는 사회적 국제적 재평가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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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김가항 성당 “김대건 신부는 사회적 국제적 재평가 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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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수원교구 설정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우리 벗아!’

 

“김대건 신부는 사회적 국제적 재평가 받아야”

발행일2002-11-17 [제2323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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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벗아!” 수원교구는 내년 10월 7일 교구 설정 40주년을 앞두고 11월 9일 수원교구청 대강의실에서 성 김대건 신부와 은이성지.김가항 성당의 관계를 조명해보는 심포지엄 「우리 벗아!」를 개최했다.
수원교구(교구장=최덕기 주교)가 교구 설정 40주년(2003년 10월 7일)을 앞두고,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해 김가항 성당의 국내 복원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하는 자리를 가졌다.

「수원교구 은이 성 김대건 신부 현양위원회」(위원장=한상호 신부)와 「교구 설정 40주년 기념사업분과 위원회」는 11월 9일 오후2시 수원교구청 대강의실에서 성 김대건 신부와 은이성지.김가항 성당의 관계를 조명해보는 심포지엄 「우리 벗아!」를 개최했다.

성직자와 수도자, 관련 학계 전문가와 관계자, 평신도 등 200여명이 참석한 이번 심포지엄은 용인 은이 성지에 김가항 성당을 복원하는 데 선행되어야 할 정당성과 학문적 토대를 점검하기 위한 토론의 장으로 마련됐다.

정종득 신부(수원교구 구산성지 주임)의 사회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은 안병선 신부(양지본당 주임 겸 현양위원회 총무)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하성래 교수(문학박사)의 「성 김대건 신부와 굴암 및 은이」 ▲서종태 박사(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의 「상해 김가항 성당과 성 김대건 신부」 ▲김정신 교수(단국대학교 건축학과)의 「상해 김가항 성당의 실측조사와 복원의 의미」에 대한 주제발표로 진행됐으며, 차기진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신의식 교수(주성대학교 중국문화학과), 윤성호 교수(한서대학교 건축학과)가 각 주제의 약정 토론자로 나섰다.

「성 김대건 신부 현양의 현주소」를 주제로 기조강연에 나선 안병선 신부는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기 위한 국내에서의 노력은 관련 저술과 연구 논문, 유해발굴, 성화와 성극 공연, 영화 및 비디오 제작, 도보 성지 순례와 유해 순회 기도회 등 다양하게 추진되어 왔다』면서 『향후 김대건 신부에 대한 현양은 가톨릭 교회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확인하고 알릴 필요가 있고, 국내에 국한된 인물이 아닌 당시 국제적인 인물로서도 재평가 받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안신부는 『인터넷과 영상매체라는 새로운 문화의 장에서 김대건 신부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물이나 자료물을 만나기는 어려웠다』고 지적했다. 

“김가항 성당 복원 원활히 이뤄지길”

기조강연에 앞서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과 교우촌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은이성지는 각각 미리내 성지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개발되지 않아 안타까웠다』면서 『오늘 심포지엄을 통해 김대건 신부의 성지인 은이를 널리 알리고, 많은 이들의 관심과 기도 속에서 향후 김가항 성당의 복원사업이 원활히 이뤄지기를 축원한다』고 당부했다. 



■ 주제발표(요지) - 성 김대건 신부와 굴암 및 은이’/ 하성래 교수 

“김대건 신부 나고 체포된 곳은 솔뫼-골배마실 아닌 용인 굴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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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성래 교수
이제까지 우리는 모방 신부가 김대건 신부를 「솔뫼 출신」이라고 한 데 근거해 그의 생애를 1821년 솔뫼 출생, 1827년 서울 청파동, 용인 한덕동, 골배마실, 신학생 선발 및 유학, 귀국 후 순교로 도식화했다.

그러나 「일성록」의 「김대건공초」에 「조선 용인 땅 태생」, 「현종실록」의 「용인 사람」, 정하상의 「용인 사는 김제준의 아들 재복」 등을 근거로 그가 솔뫼 태생이 아니라, 용인 굴암 태생임을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수 있다.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은 비록 고향을 떠나 살지라도, 자신의 고향을 말할 때면 그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가문의 고향을 들어 말하는 사회적인 통례가 있다. 김대건 신부가 비록 용인 땅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솔뫼 김씨 집안」이라고 말한다든가, 「솔뫼 김씨 집안 자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료로 볼 때, 김 신부가 체포된 곳은 이제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골배마실이 아니라 용인 굴암이며, 골배마실로 이사온 것은 김제준이 순교한 후 그의 처 고우술라가 남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온 것으로 보여진다.

은이는 1830년 이여진의 선종지이며, 1836년 김대건 신부가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곳이다. 이곳은 또 1846년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가 살다가 잡혀간 곳이다. 동시에 은이는 성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처음으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은이상뜸이 모친댁에 와서 머물며 그 주변 교우들과 함께 부활절 미사를 드린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은이에 1830년대, 또는 그 이전부터 공소가 있었다는 것은 은이가 그 지역 교우촌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며, 이는 은이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곳임을 입증한다 하겠다.

굴암과 은이는 각각 김대건 신부가 탄생하고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역사적 의의가 깊은 곳이다. 은이 뿐만아니라 굴암 지역도 성지로서 개발되고 성역화되어야 한다. 



■ 주제발표(요지) - ‘상해 김가항 성당과 김대건 신부’/ 서종태 박사 

“실측 결과 사제품 받은 성당, 증축 보수 가능성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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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종태 박사
중국 상해 연안에 위치했던 김가항 성당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았던 곳이다. 김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이곳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으며, 8월 24일 상해에서 약 30리되는 곳에 위치한 횡당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했다.

김가항 성당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 품을 받은 뒤 곧 잊혀졌다가, 오기선 신부가 1990년 7월 「가톨릭신문」의 취재단을 인솔해 김가항 성당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부터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오기선 신부 일행은 성당 관계자로부터 「김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본래의 성당은 파괴된지 오래고, 후대에 새로 세운 세 번째 건물이 들어섰다」는 설명에 따라 그것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대신에 김대건 신부의 유해, 석고상, 초상화 등을 성당측에 기증해 김대건 신부를 현양하는 활동을 주로 지원했다. 이후, 김가항 성당은 김대건 신부를 매개로 한 한.중 양국 교회의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명소로 발전하게 됐다. 그러나 김가항 성당은 상해 정부의 포동 지역 개발 정책에 따라 지난해 3월 30일 철거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는 김가항 성당이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았던 본래의 성당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체계적으로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상해종교지」, 「양경향지」, 「강남전교사」 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김가항천주당」에서 발췌한 구체적인 문헌 자료를 살펴보면, 김가항 성당은 명나라 숭정 년간(1628∼1644)에 처음 세워진 이후 계속해서 확대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일본군과 국민당 군대의 포화로 인해 증축되고 보수되었을 지는 모르지만, 1872년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큰 성당을 별도의 장소에 건축할 때까지 기존에 있던 옛날 성당 건물은 계속해서 본당으로 사용됐다. 즉, 새로운 큰 성당을 사용할 때에는 기존의 성당 건물(김신부가 사제품을 받았던 성당)을 교사와 교우들의 학습 등 교육관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문헌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김가항 성당에 관한 사실들은 건물 구조의 실측?조사 결과와도 합치된다. 



■ 주제발표(요지) - ‘김가항 성당 실측조사와 복원 의미’/ 김정신 교수 

“상해 김가항 성당 재현은 내면적 이미지 형상화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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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신 교수
건축의 현장은 시공간의 맥락속에 존재한다. 중국 상해의 김가항 성당을 양지의 은이공소에 재현하고자 할 때, 자칫 시간성과 장소성의 개념이 충족되지 않는 건물의 모형(껍데기)으로 남게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충분한 고증이나 자료가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시대적 의식도 그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재현의 방법도 「미메시스(자연모방)」 적인 모방이나 모사가 아니라 「구술」과 「이미지」를 통한 체험적 재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체험적 재현이란 대상의 외적인 모양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능력과 내적인 감수성을 통해 다양한 매체의 특성을 이용, 보다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이미지를 파악하고 형상화하는 것이다.

김가항 성당의 실측조사는 철거되기 직전인 2001년 3월 24일과 25일 양일간에 이뤄졌으며, 건물이 높지않고 주변에 여유공간이 있기 때문에 수작업에 의한 직접실측이 가능했다. 다만 문양이나 디테일의 정밀한 실측은 어려웠고, 건축양식과 구조 및 재료의 노후상태 등을 파악하는데는 무리가 없었다.

김가항 성당의 전체 대지는 약 3760㎡(1137평)이며, 성당의 평면은 장방형으로 단변이 9.09m, 장변이 25.108m로서 약 228㎡(69평)이다. 여기에 2층의 김대건 신부 기념관이 우측에, 단층의 제의실이 좌측에 연결돼 있다. 성당의 높이는 처마까지가 4.363m, 지붕 용마루가 7.56m이다.

성당의 내부는 5개씩의 양열주에 6칸의 장변축으로 구성되어 맨 마지막 칸이 제단을 구성하고 있다. 지붕 가구 형식은 전통적인 중국 목구조의 대량식을 따랐고, 횡축(도리방향)과 종축(보방향)을 바꿈으로써 넓은 실내공간과 바실리카식 공간을 확보했다. 또, 출입문과 창호에 아치를 둠으로써 교회의 이미지를 나타냈다.

직접 실측조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건물의 증축사실과 문헌기록, 그리고 현지 중국신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김대건 신부의 사제 수품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상해에서의 중국식 성당건축의 건립 과정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으며, 60여평에 불과한 김가항 성당이 당시 남경교구 주교좌성당이었다는 것도 밝혀냈다. 셋째, 중국식 성당 건축의 구조와 내부공간 구성 및 장식 상세 등을 알 수 있었다. 넷째, 중국의 성당건축 양식의 수용과 토착화 과정의 실증적인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다섯째, 시공간의 맥락속에 존재하는 건축물을 다른 곳에 재현하고자 할 때 시간성과 장소성 개념, 재현 대상의 내면적인 이미지와 방법론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있어야 하겠다.

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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