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교회가 간다Ⅱ] 23.중국 (2)서광계와 상하이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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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교회가 간다Ⅱ] 23.중국 (2)서광계와 상하이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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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교회가 간다Ⅱ] 23.중국 (2)서광계와 상하이교구

발행일2006-11-19 [제25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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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과거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평신도에 의한 신앙 전파… 한국교회와 닮아

‘18세미만 종교교육금지’ 등 정부규제로 어려움 

서광계와 서가회 

“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태 13, 32) 

드라마틱하기까지 한 성경의 이 구절을 중국 땅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는 곳을 들라면 상하이교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상하이교구는 물론 중국 교회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존재 서광계(徐光啓.바오로.1562∼1633). 중국 교회의 세 기둥(三柱石) 가운데 첫 자리에 꼽히는 서광계가 나고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곳이 바로 상하이다. 평신도에 의해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한국 교회와 닮은 점을 찾을 수 있어 상하이는 어떤 곳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상하이교구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교구의 맹아를 서광계의 입교에서 찾을 정도로 그가 교회에 남긴 유산은 가늠키 힘들다. 그는 1596년 광둥성(廣東省) 사오저우(韶州)에서 예수회 선교사 카타네오를 만나 처음으로 천주교와 서구과학문물을 접한 후 1603년 난징에서 로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607년 한림원 관리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서가회(徐家匯.쉬자휘)에 성당을 건립하면서 온힘을 선교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상하이의 상업 중심지로 지금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서가회도 그의 가족과 후손들로 인해 붙게 된 이름이다. 

그는 서양 선교사들을 도와 한역서학서의 저술과 간행에 헌신한 것은 물론 스스로도 ‘벽망(闢妄)’을 비롯한 많은 서학서를 번역해 후손들에게 풍부한 영적 자산을 남겼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663년경 상하이에는 이미 2개의 성당을 비롯해 66개의 경당에 4만명의 신자가 생겨나게 됐고, 18세기 초에는 쟝수성(江蘇省) 전체 신자 10만명 가운데 8만명이 상하이 부근에 살 정도로 성장했다. 

서광계가 뿌린 씨앗이 자라나 상하이 교회는 꾸준한 성장을 거듭하며 1933년 12월 13일 대목구로 설정되고 1946년에는 교구로 승격됐다. 이후 중국의 공산화와 문화혁명 등으로 암울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의 후광은 지금도 상하이교구 곳곳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이름을 딴 광계사. 

문화혁명이 끝난 후 중국에서 다시 공식적인 종교활동이 가능해지던 시기인 1985년 설립된 광계사(The Guang Qi Research Center)는 교계 연구 및 출판 기관으로는 중국 내에서 단연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여기서 나온 중국어 성경이나 기도서, 전례서 등 각종 신앙 서적과 자료들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중국 교회를 살찌우는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교구 주보를 비롯해 각종 교구 출판물을 발행하고 있기 때문에 광계사에서 나오는 간행물에 대한 검열은 철저한 편이다. 올 한해 동안에만 최신 CD자료를 포함해 각종 서적 등 35종의 출판물을 발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을 정도여서 광계사가 지닌 역량과 중국 교회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교구에서 운영하는 광계영성센터와 광계컴퓨터학교, 광계노인요양원 등은 한 사람에게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향기가 얼마나 오래도록 남아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가 지었던 서가회성당은 1911년 다시 지어졌으나 한동안 폐쇄되었다가 1979년 11월에 다시 문을 열어 지금은 주교좌성당으로 상하이교구의 주추가 되고 있다. 

교구의 빛과 그림자 

상하이는 1842년 8월 아편전쟁 결과로 체결된 난징조약에 의해 구미 열강에 개방되고 외국인 조계가 설치되는 등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을 침략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아울러 선교사들을 통해 서구의 종교가 중국에 진출하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상하이는 중국에서 손꼽히는 대외무역과 상공업 중심지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1949년까지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이런 영향으로 상하이는 지금도 사목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더구나 중국에서는 법적으로 18살 미만의 국민에 대한 종교교육이 일체 금지돼 있어 상하이교구에서도 유아 세례는 찾아보기 힘들고 주일학교 운영도 기대하기 힘든 실정이다. 

“한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게 마치 대나무밭에서 대나무를 뽑아내는 것과 같다”는 한 선교사의 말은 대나무 뿌리가 얽히듯 수많은 관계가 얽히고 설켜 그만큼 선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하이교구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중국에 신정부가 들어서던 1949년 30만명이 넘던 신자수가 2000년 현재 14만명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활력을 찾아가고 있는 상하이교구의 모습은 중국 교회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게 한다. 

희망은 자라나고 

상하이에서 제일 높은 서산(余山) 마루에 위치한 서산성모대성당. 1935년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을 혼합해 지어진 성당은 그 아름다움으로 매년 성모성월이면 중국 각지에서 5, 6만명의 순례객들이 찾는 것은 물론 평소에도 관광객으로 붐비는 명소로 자리잡아 선교에도 한몫을 하고 있다. 서산성당 발치로 난 십자가의 길과 그 길 끝자리에 조성된 ‘삼위일체정자광장’, 그리고 그 옆의 중산성모성당 등은 서산이 마치 애초부터 성지로 꾸며진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하다. 서산을 둘러본 후 들른 서산 산기슭의 상하이교구 서산신학교에서는 학장 신부와 6명의 신학생들이 소탈한 점심을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돼지고기와 생선조림에 새우국이 놓인 단출한 식탁에서 식사를 마치고 자신이 먹은 식기를 손수 씻어 찬장에 가지런히 챙겨두는 모습은 이국인에게는 이채롭게까지 보였다. 이런 모습들은 중국의 다른 신학교에서도 두고두고 볼 수 있는 광경임에도…. 

영성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신학교의 한 신부는 한국 신자들의 열성에 대한 찬탄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의 안내로 찾은 서산신학교 애덕도서관. 오래된 책 냄새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도서관에서는 8만권의 책이 중국교회의 희망처럼 서가에서 빛나고 있었다. 1848년 서가회에 세워져 1954년 신학교가 폐쇄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3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던 곳이었지만 1982년 다시 문을 열어 서산으로 옮길 때까지 안팎의 지원이 끊기면서 고가의 희귀도서부터 처분 대상이 되고 말았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현재 80명 안팎의 신학생들이 성소의 길을 고르고 있는 서산신학교는 올해 1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상하이교구뿐 아니라 인근의 푸젠(福建), 쟝시(江西), 안후이(安徽), 저쟝(浙江), 쟝수(江蘇), 산동(山東) 등 6개 지역에서 10명이 새로 성소를 찾아 입학하는 등 중국 교회의 요람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들 성소자들은 3년 과정의 소신학교를 졸업한 후 2년의 철학과정을 시작으로 실습 1년, 4년의 신학 공부를 마치더라도 종교국의 허가를 얻지 못하면 사제 품을 받지 못한다. 이로 인해 신학교 졸업 후에도 2, 3년간 사제품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며 신학교나 교구 일을 돕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더구나 중국의 신학교들은 사회적으로 정식 학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 점 또한 교회 발전에 발목을 잡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사제품을 받은 후에도 향후 활동을 위해 유학을 떠나거나 일반 대학에 다시 진학하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신앙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나마 이 또한 교구 재정이 허락하거나 외부의 도움이 있는 경우에나 가능해서 대부분의 사제들은 공인 학력이 낮아 대사회적으로도 활동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적잖다. 

중국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한 교구에, 교구에서 설립하거나 지정하는 하나의 수도회만이 활동하는 게 보통이다. 상하이교구의 경우에도 지난 1985년 교구에서 설립한 성모헌당회(The Congregation of Presentation of Mary)에서 배출된 수녀들이 광계사를 비롯해 사회복지 시설 등 교구의 각종 사목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의 종교인들은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탈출구를 찾고자 하지만 여권도 만들지 못할 정도로 제약이 많은 실정이다. 여기서 가까운 이웃이자 형제인 한국교회의 몫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설명

▶상하이에 천주교 씨앗을 뿌린 서광계.

▶서가회주교좌성당을 찾은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다.

▶상하이교구청 전경. 뒤로 중국의 발전상을 드러내는 고층건물들이 보인다.

▶상하이에서 제일 높은 서산 마루에 위치한 서산성모대성당.

서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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